발리 한달살이 Day 12
이제 캠프 일정이 중반을 넘어섰다. 오늘은 아이들이 오전에 보트를 타고 거북이를 보러 가는 날이었다. 아직 컨디션이 다 돌아오지 않은 딸이 혹시라도 배를 탔다가 멀미를 할까 봐 아는 언니에게 멀미약을 하나 빌려 먹였다.
발리 한달살이를 위해 나름 그 어느 때보다 짐을 꼼꼼히 싼다고 쌌음에도 불구하고 열흘 정도 지내다 보니 꽤 빠뜨린 것이 많았다. 멀미약, 자가진단키트, 딸이 쓰던 피부연고, 일회용 수저 등. 하지만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 문제 될 물건들은 아니기에 아직까지는 넉넉히 준비해온 사람들에게 빌려 쓰면서 버티고 있다.
우리는 이번에 캐리어 두 개를 가지고 왔는데 큰 캐리어는 22kg, 작은 캐리어는 10kg 정도였다. 일행 중에는 30kg씩 캐리어 2개, 총 60kg을 채워서 온 경우도 있었다. 캐리어 중 1개는 모두 먹을 것과 관련된 짐들이라고 했다. 쌀과 김, 간단한 밑반찬 류 및 이곳에서 직접 음식을 해먹일 수 있는 각종 조리도구들을 다 챙겨 왔다고 했다. 아직 아이가 어리기도 했지만(8살), 엄마의 정성이 대단하다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바리바리 싸들고 온 각종 도구와 그때그때 마트에서 공수한 재료들로 캠프 시작 후 거의 매일 저녁밥을 해 먹였고, 그 결과 아픈 아이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아이는 잘 버티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매일 저녁밥을 해먹인 그 정성이 부메랑이 되어 그 엄마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엄마의 아이와 같은 반 아이 중 성별이 같고 나이가 같은데 아빠 혼자 데리고 온 아이가 있었다. 캠프 첫날부터 아이들끼리 친해지는 바람에 거의 매일 저녁을 함께 먹고 심지어 지난 주말의 일정도 아이 둘과 각자의 엄마, 아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4인 가족으로 오해할 구성으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매일 한국식 저녁밥을 해먹인 그 엄마 입장에서는 애들끼리 이미 친해져 버렸는데 딱 선 긋고 자기 애만 먹이기가 난처해서 자연스럽게 애들을 같이 먹이게 된 거고, 그러다 보니 또 자연스럽게 그 아빠와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오다가다 봤지만, 매번 그렇게 넷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수영장과 바로 연결되는 방이어서 다른 아이들도 한입씩 얻어먹기도 하고, 그 아이들의 엄마들도 같이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그랬었다.
하지만 낮에 여자들끼리 있을 때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남자의 부인이 오해하는 거 아니냐며 조심하라는 충고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밤, 그 남자의 부인이 합류했고, 바비큐 자리에서 합석을 하게 되어 몇 마디 나눠본 결과, 각자 나름의 기준에서 그 부인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 느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드디어 문제가 터진 것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얼굴을 보자마자 자기 애가 어제 당신의 애한테 맞았는데 사과를 제대로 못 받았다며 자기가 직접 그쪽 애한테 사과를 받아도 되겠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아, 온 지 하루 만에 분위기를 난처하게 만드는 재주가 보통이 아니구나. 그럴 일도 없겠지만 나는 저 여자와 엮이지 말아야지 싶었다.
그래서 실컷 열흘 가까이 매일 저녁을 해먹이고도 고맙다는 인사 대신 눈탱이를 맞은 그 엄마가 아이들 체크인 후 하소연을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된 여자들의 수다는 오전 내내 그리고 점심을 먹을 때까지 이어져 오후 2시에야 나는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5시간 동안 그 얘기만 한 것은 아니고 이런저런 다양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기는 했지만, 나는 어쩐지 12시 정도부터는 조금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최대한 티를 안 내고 대화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티가 났어도 어쩔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서도 소속된 아이 엄마들의 모임 자체가 거의 없을뿐더러 가끔 그런 자리가 있어도 2~3시간 정도(밥 먹고 커피 한잔 하고 끝)가 내가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었던 거 같다. 어느 정도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은근슬쩍 아이가 되었든, 남편이 되었든, 하다못해 시부모나 친정부모가 되었든 자신이 아닌 주변인들에 대한 자랑질을 하는 그런 대화가 나는 싫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대화란, 서로의 경계를 어느 정도 허문 상태에서 자신이나 아니면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포커스를 맞춘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수다, 즉 뒷담화는 나에게 스트레스 요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엄마들의 모임에서는 그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메인 주제이기 때문에 나랑 안 맞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상황은 제 3자에게 전달받는 순간 사실에서부터 어느 정도는 왜곡된다고 생각한다. 그 상황에 있었던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야 그나마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내용을 접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리고 3명 이상부터는 상대방에게 오롯이 집중한 대화를 나누기 어렵다고 믿는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A, B, C 세 사람이 있을 때, A-B, B-C, C-A 사이의 친밀도가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또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그냥 수다 떠는 거 가지고 유난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내가 즐겁거나 편하지 않은 의미 없는 수다를 시간 내어 떨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30대 중반 이후부터는 친구를 만나도 거의 1:1로만 만나게 되고, 좀 생각 없이 가벼운 수다를 떨어야 할 때도 입을 닫고 있는 편이다.(그래서 시댁에 가면, 전형적으로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시어머니에게 매번 한 소리를 듣곤 한다.)
아무튼 발리에 와서까지 수다 수다 수다가 이어지다 보니 내일 하루는 나 혼자만의 시간을 좀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저녁에는 내일 혼자 갈 곳을 좀 찾아봐야겠다. 하지만 이래 놓고 막상 내일 아침이 되면 나는 또 엄마들과 커피를 마시게 될지도 모르겠다. 인생이 생각대로만 계획대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내일 하루가 어떤 모습으로 흘러가 내일은 어떤 글을 쓰게 될지 지금부터 단정 짓지는 말아야겠다.
P.S
아무래도 음식이 한국에서보다 부실하다 보니 딸아이의 체력이 저하된 것 같아, 한국에서도 잘 안 하는 집밥을 외국에서까지 해 먹이지는 못하고 오늘 저녁은 한식당에서 라면, 계란찜, 돌솥비빔밥을 먹고 왔다. 그래도 오랜만에 한국 음식을 먹어서 기분도 좋아지고 컨디션도 좋아졌는지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딸이 먼저 저녁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나는 오늘 낮에도 트레드밀 위에서 땀을 비 오듯 쏟았기 때문에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딸의 사기충전을 위해 동참했다. 운동 후 룸으로 들어와 씻고 오렌지와 샤인 머스캣을 먹으며 나는 글을 쓰고 딸은 그림을 그리는 공조를 12일째 이어가고 있는 이 시간이 지금 이 순간도 흘러가고 있음이 벌써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