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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우히어 Nov 17. 2019

순응하지도 반항하지도 못해 회피했던 지난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를 읽고


인생의 반 정도를 살아오며(물론 이는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 사이에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나의 소망이 실현되었을 경우에 해당하는 것이겠지만) 돌이킬 수만 있다면 꼭 돌이키고 싶은 선택들이 몇 가지 있다. 성향 상 지나온 과거에 집착하거나 매몰되어 후회만 하기보다는 현재를 즐기며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편이지만, 그래도 사람인데 어찌 후회가 없겠는가. 오늘은 그중 비교적 최근의 후회에 대해 써보려 한다.

사실 그 선택과 그로 인한 결과, 그 과정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짧은 글 한편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거의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중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일은 30대 중반의 아이 엄마였던 내가 멀쩡한 직장을(물론 이것도 지나고 보니 멀쩡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 당시에 그 직장은 나에게 숨 막히는 벗어나고 싶은 곳 일 뿐이었다) 그만두고 다시 학생이 되고자 한 선택이었다.

그 선택 자체에도 잘못된 점이 많았었다. 바로 위에 쓴 것처럼 워킹맘에서 스터딩맘이 되려고 했던 이유가 정말 깊이 있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와 맞지 않았던 조직에서 나오고 싶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선택이다 보니 새로운 조직(대학원 연구실)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충분히 대비하기보다는 현재의 조직에서 나오게 된다는 해방감과 더불어 새로운 환경이 내 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충만하기만 했었다.

유치원생 아이를 둔 엄마인 나는 다시 학생이 되었다는 기쁨에 젖어 박사과정으로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석사과정 마냥 의욕만 잔뜩 지닌 채 학우들 앞에서 나를 어필하고 교수님 앞에서 나를 과대포장했었다. 그 결과 내가 담을 수 없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고, 나는 어이없게도 프로젝트 실무를 시작하는 첫날, 휴학 원서를 내고 말았다. 사실 나는 그동안 휴학을 하게 된 이유가 프로젝트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어떤 책을 읽으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내가 물론 좀 충동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한 가지 이유로 나의 선택을 번복할 사람은 아니지.

샐리 티스데일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라는 죽음에 관한 에세이였다. 그 책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유형에 대한 부분을 읽는 순간,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으로 있었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4. 의사소통 중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7년 만에 박사과정으로 교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교수님은 그 사이 많이 변해 있었다. 아니면 석사 나부랭이였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교수님의 실체를 그제야 알게 된 걸 수도 있고. 아무튼 그 사이에 교수님의 프로젝트는 다학제적 접근이 핵심 키워드가 되어 있었다. 내가 전공했던 분야와 그 인접 학문뿐만 아니라 의학, 공학, 생물학 등으로 그 영역이 확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당시 우리 연구실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달리 말하면 교수님의 학생이라면 전원이 참여해야 했던 프로젝트는 교내 의대와 협업하여 진행되던 프로젝트였다. 너무 상세하게 말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아 키보드를 치던 손이 느려진다.

암수술 환자들에게 임상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전과 후에 그들의 타액을 채취하여 프로그램의 효과성을 검증하는 프로젝트였다. 학생들은 돌아가며 수술 후 입원해 있는 환자들과 그 보호자들에게 프로젝트의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구한 후 문항이 많은 설문지 2부(사전-사후)와 타액을 받을 수 있는 용기를 3개씩 전달했다. 그리고 환자가 설문지에 체크를 하고 타액을 다 받았다고 보호자가 연락을 주면 다시 방문해서 수거해왔다.


최초에 10명의 암환자들을 컨택하면 그중에 3~4명이 프로젝트 참여에 힘겹게 동의를 해주었고, 동의를 했다고 하더라도 “사전 설문지 작성 - 일정한 주기마다 타액을 3회 모으기 - 사후 설문지 작성”이라는 과정을 모두 수행하는 사람은 2명 정도였다. 그만큼 참여자 자체를 확보하고 그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바를 끝까지 얻어내기가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힘들수록 교수님은 우리들을 더 채찍질했고, 우리들은 아니 나는 기계적으로 그 과정을 수행했다. 심지어 학생들 사이에서 환자들을 잘 설득해 동의를 구하는 확률이 높은 사람을 약간 인정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그래서 2인 1조로 병실에 갈 때, 설득의 달인과 보조자가 짝을 이루어 가곤 했었다. 그 당시 우리들은 위의 방문자 유형 중 딱, “리포터”들이었다.

나는 수업이나 회의가 없는 시간에 병원에 가는 것이 너무나 싫었었다. 원래 개인적으로도 병원과는 안 친한 편이다. 정말 최소한으로만 병원을 이용하는 나이기에, 아마 그때가 살면서 가장 짧은 시간 동안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수술 후 거동이 불편한 환자, 그리고 환자를 보살피느라 피곤에 절은 보호자. 그들에게 프로그램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같으면 설문지를 내밀고 조금 관심을 보이는 것 같으면 용기를 전달하는 그 과정에서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얼마나 실례를 하는 것인지 생각은 해봤을까? 그리고 단 한 번도 자신이 직접 환자들에게 프로그램을 설명한 적이 없으면서 우리들만 다그치던 교수님은 과연 그 프로그램이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무 생각 없이 교수님이, 선배들이 하라고 시키니까 기계적으로 앵무새처럼 정해진 말을 하고 보호자들의 연락처를 수집했던 그 시간이 너무 불편했었다. 타액을 보관했던 방법이나 성실하게 응해주지 않던 참여자들을 폄하했던 회의시간 등은 굳이 거론하지 않겠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교수님이나 선배들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다. 스스로 불편하면서도 의심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주어진 일만 최소한으로 했던 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이다.

얼마 전, 수능이 치러졌던 날 “순응이 곧 끝납니다”라는 글이 화제가 되었었다.


https://www.instagram.com/p/B4176zXnOwD/?igshid=1ma34yzo223r7


그 글에서 “우린 당신이 제대로 찍길 바랍니다. 정답을 찍는 것이 아니라 이 시스템에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출발을 하길 바랍니다. 우린 당신이 제대로 붙길 바랍니다. 대학에 붙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기조대로 세상과 제대로 한 판 붙길 바랍니다.”라는 문구를 보면서 약간의 소름이 돋았다.

다시 들어간 학교에 나는 순응하며 버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항하며 목소리를 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회피했다. 학교는, 연구실은, 교수님은 나 하나 없어도 아무런 지장 없이 계속 같은 방식의 연구를 하고 있겠지. 혼자 빠져나온 나에게는 이제 와서 잘못을 지적하거나 바로잡을 자격은 없지만, “순응이 곧 끝납니다”라는 글을 보며 돋았던 소름을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더욱 생생하게 느껴보고 싶다. 내 팔에만 돋았다 금방 사그라드는 소름이 아니라 우리를 나를 순응하게 만드는 더 많이 가진 자들의 팔에도 소름이 돋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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