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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i generis Jun 03. 2022

Chapter 8 외전. 윤석열 대통령에게 자유란?

당신의 자유 개념은 안녕하신가요?

국내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자유의 권리(Freedom's Right)"를 해설하는 글입니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철학을 위해 제가 가장 먼저 "자유의 권리"를 연재하는 이유는 이 작업 안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도구가 담겨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꼭!! Chapter 1. 부터 읽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Prologue도 있긴 합니다). 감사합니다 :)


저는 지난 글들을 통해 호네트가 설명한 소극적 자유와 반성적 자유 모델, 여기서 도출된 정의의 원리들, 그리고 각 자유 개념의 문제점들을 소개했습니다.

이번 회차에서는 Chapter 9. 사회적 자유(Social Freedom)로 향하기 전,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내용들을 토대로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몇몇 발언들을 통해 그는 어떤 자유의 개념을 승인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Chapter에서 자유에 관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선정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각 구성원들이 자신만의 좋은 삶을 위해 - 호네트의 설명을 따라 - 소극적 자유를 승인하는지, 혹은 반성적 자유를 승인하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앞으로 살펴볼 사회적 자유를 적극적으로 승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한적으로 설정된 시도조차도 저는 윤 대통령의 의중을 모두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승인하는 자유 개념에 관한 옅은 스케치 정도로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Chapter가 여러분에게 자유에 관한 우리의 보편적 상상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회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호네트가 설명하는 소극적 자유와 반성적 자유, 각각 도출된 정의론과 이들의 한계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해 주세요.


https://brunch.co.kr/@2h4jus/8

https://brunch.co.kr/@2h4jus/11

https://brunch.co.kr/@2h4jus/15

https://brunch.co.kr/@2h4jus/17

https://brunch.co.kr/@2h4jus/19



우리에게 '자유'라는 말은 너무 익숙해서, 별도의 개념 정리가 요구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최근엔 세대를 가리지 않고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흔히 사용되기도 하고, 언젠가부터 애국 보수를 자칭하는 분들은 '자유'라는 말과 결코 분리될 수 없어 보입니다.

정치권에서는, 특히 보수 정당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고, 우리는 '자유'가 포함된 각종 단체명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자유청년연합', '자유민주총연맹', '한국자유연합' 등등.  


지난달 대통령 취임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 역시 단연코 '자유'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일관성 있게 자유, 자유민주주의, 공정, 상식, 법치주의를 이야기해 왔는데요. 이와 관련된 그의 발언은 여러 구설수에 시달리기도 했고,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간의 구설수와 비판을 한몫 거들기보다는 윤 대통령이 자주 언급했던 '자유' 개념이 그간 제가 소개한 소극적 자유 모델과 반성적 자유 모델 중 어떤 것을 승인하는 것인지 여부를 따져보겠습니다.

이 과정이 (저에게)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각각의 자유 모델이 거기에 어울리는 정의의 원리들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정의의 원리들은 분명 향후 윤석열 정부의 정책 방향을 결정할 것입니다.

따라서 윤 대통령이 승인하는 자유 모델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그가 강조해 온 공정과 상식에 부합하는 정의의 원리들이 정확하게 무엇을 지칭하는지, 그리고 향후 정부 정책은 어디를 향하는지 예측해 볼 수 있겠습니다.


본론에 앞서 결론부터 이야기해 보면, 제가 보기에, 윤석열 대통령은 그간 발언에서 소극적 자유 모델과 적극적 자유 모델을 혼용하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개념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공정과 상식이 무엇인지에 관해 모호한 메시지들을 전달하고 있는데요.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관련된 논란과 비판을 통해 잘 알려진 윤 대통령의 후보 시절 '자유'에 관한 발언을 살펴보겠습니다.



2021년 7월 19일 매일 경제와의 인터뷰 중


현 정부는 주 52시간 제로 일자리가 생긴다고 주장했지만 일자리 증가율이 (작년 중소기업 기준) 0.1%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실패한 정책이다. 스타트업 청년을 만났더니, 주 52시간 제도 시행에 예외조항을 둬서 근로자가 조건을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하더라.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상부에서 뭐 이런 거 단속해라 저런 거 단속해라 하는 (식품위생) 단속 지시가 막 대검 부서를 통해서 일선 청으로 막 내려오는데, 이제 프리드먼 책을 이렇게 보면은 거기에 다 나와요. 이런 거는 단속하면은 안된다. 왜냐하면 단속이란 것은 퀄리티 기준을 딱 잘라 줘 가지고 이것보다 떨어지는 것은 전부 형사적으로 단속하라는 건데, 프리드먼은 그 아래로 완전히 정말 먹으면은 사람이 병 걸리고 죽는 거면 몰라도, 부정식품이라 그러면은 없는 사람들은 그 아래 것도 선택할 수 있게, 더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이거야. 이거 먹는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예를 들면 햄버거를 50전 짜리도 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걸 팔면서 위생 기준이나 이런 퀄리티를 5불짜리로 맞춰놓으면, 그거는 소비자의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



그리고 지난달 취임사의 앞부분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

저는 이 나라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로 재건하고,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갖고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

저는 이 어려움을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입니다.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그리고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자유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자유로운 시장이 숨 쉬고 있던 곳은 언제나 번영과 풍요가 꽃 피었습니다.

번영과 풍요, 경제적 성장은 바로 자유의 확대입니다.

자유는 보편적 가치입니다.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이 자유 시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방치된다면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자유마저 위협받게 됩니다.

...

출처: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 ( 전 문 )-미디어투데이 - http://www.mediatoday.asia/498997



취임사에서 밝힌 것처럼,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를 보편적 가치로 이해합니다.

그가 보기에, 이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인류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그래서 자유의 확대를 통해 이 찬란한 역사를 확장시켜야 하고, 자유가 위협받지 않도록 기존의 자유를 위한 합의가 잘 유지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앞선 인터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윤석열 대통령은 스스로 보편적 가치라고 생각하는 자유를 '내가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추구하기 위한 상호 간 합의'에 대입합니다 (여기서 그가 인용한 프리드먼은 이 추측에 강력한 증거를 제공합니다).

보편적 가치인 자유를 상호 간 자유로운 합의로 여기면서, 윤 대통령은 이 '자유로운' 합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자유 개념을 승인하고 있는 것이지요.


윤 대통령이 승인한 이 자유 모델은 호네트가 설명한 설명한 소극적 자유 모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호네트에게 소극적 자유란 "개인의 자유는 외적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타인을 향한 어떤 책임감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바를 - 개인의 모든 독특한 욕망들을 포함하여 -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으로 구성" 됩니다.

여기서 도출된 정의의 원리는 "소극적 자유에 몰두하고 있는 (순수하게 사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개개인을 가능한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이들의 방해받지 않을 주관적 권리를 확립하고 강화하는 것"이 됩니다.

개인의 주관적 권리 보장을 위한 이 계약, 즉 정의의 원리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강제 권력이 요구되는데, 그 역할은 국가가 담당하게 됩니다.

이 정의의 원리는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협력이나 연대보다는, 단순히 개인의 주관적 권리를 보장하고 적용하는 것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윤 대통령이 승인한 자유가 소극적 자유 모델이라면, 그가 생각하는 정의의 원리는 "누군가 내가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추구하기 위해 상호 간 합의에 도달하게 되면, 그 이후로는 누구도 이 자유로운 행위에 개입해서는 안되며, 정부는 이 권리를 법으로 보호해야 한다"가 됩니다.

 정의의 원리만이 윤석열 대통령이 주장하는 공정, 상식, 그리고 법치주의에 부합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그리고 저에게 흥미로운 것은, 취임사 중반부에 등장하는 '자유' 개념이 앞서 윤 대통령 스스로 승인했던 소극적 자유 모델과는 다르다는 점입니다.

다음은 취임사 중반부 중 일부입니다.



...

자유는 결코 승자독식이 아닙니다.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기초, 그리고 공정한 교육과 문화의 접근 기회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이런 것 없이 자유 시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자유가 유린되거나 자유 시민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모든 자유 시민은 연대해서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개별 국가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기아와 빈곤, 공권력과 군사력에 의한 불법 행위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고 자유 시민으로서의 존엄한 삶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모든 세계 시민이 자유 시민으로서 연대하여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공정한 규칙을 지켜야 하고, 연대와 박애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

출처: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 ( 전 문 )-미디어투데이 - http://www.mediatoday.asia/498997




여기서 언급된 '자유' 개념은 분명 윤석열 대통령이 앞부분에 활용했던 '자유' 개념과 다릅니다.

그는 앞서 스스로 보편적 가치라고 생각하는 자유를 '내가 원하는 바를 자유롭게 추구하기 위한 상호 간 합의'에 대입시켜 이해함으로써, 이 합의를 위해 법을 통한 주관적 권리 강화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취임사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다시 보편적 가치인 자유를 보편적 존중이 요구되는 '연대'의 개념과 더해 슬그머니 그 범주를 확장시키기 시작합니다.

'사전에 합의된 대로 외적 방해 없이 나의 욕망을 추구하는 자유의 권리'가 그 과정에서 누군가 더 큰 이익을 얻게 되어 그의/그녀의 자유가 확대된다면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 이익), 그래서 다른 이들의 자유가 축소된다면 (경제적, 교육적, 문화적 손해), 이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는 (혹은 국가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의 '자유' 개념은 호네트가 소개했던 반성적 자유(Reflexive Freedom) 모델에 더 가까이 있습니다.


호네트가 설명하는 반성적 자유와 여기서 도출되는 정의의 원리를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소극적 자유 개념 속 개인의 행위 목적이나 목표가 의미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관해 의구심을 제기하면서, 자유의 개념을 한 개인 외적 방해를 받지 않는 임의적으로 행동할 권리로만 이해하지 않는 반성적 자유 개념이 태동하게 됩니다.

반성적 자유를 승인하는 이들은 주체성에 관해 내적으로 지향된 숙고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개개인의 본능이나 욕망에 의해 동기화된 행위를 너머, 이들의 행위가 전적으로 자신들만의 의도로 인도될 때만이 자유에 그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자아를 향한 주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반성적 자유를 승인하는 이들은 개개인의 행위가 전적으로 자기 진실적인 (self-authentic), 자율적인(autonomous), 혹은 자기실현적인 (self-actualised) 의지에 따라 자신의 의도에 의해 인도될 때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루소의 자기 진실성을 기반으로 한 자유 (행위자의 의지), 칸트의 도덕적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자유 (자기 입법), 그리고 헤르더의 자기실현을 기반으로 한 자유 (의지의 정화) 모두 반성적 자유를 기반으로 여기에 풍성한 개념들을 더하면서 구체화된 모델이며, 특히 칸트와 헤르더의 자유 개념은 오늘날까지 여러 분야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반성적 자유에서 도출된 정의의 원리들은

(i) 보편성의 가능성과 같은 방식으로 도덕적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자기 입법의 자유', 보편적 존중의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주체성의 합리적 '자기 제한의 자유'와 같은 (도덕적) 자율성의 관점에서, 사회 전체의 협력을 위한 '정의의 절차적 개념 (procedural conception of justice)'을 지향하거나 (대표적으로 롤스나 하버마스),

(ii) 스스로를 형성하고 발견하며 표현하는 행위의 과정인 자기실현의 관점에서,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이 과정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 체계를 지향합니다. 이 자기실현의 과정은 (a) 배타적인 개인 행위의 관점에서 이해되는가, 혹은 (b) 공동의, 협력적인 노력의 관점에서 이해되는가에 따라, 정의의 원리는 (a)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여기서 최대 행복은 최고의 좋음, 즉 자유를 의미합니다)"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타협과 (J. S. Mill), (b) 우리 모두의 집합적인, 공동의 협력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공화주의 (혹은 공동체주의)로 (대표적으로 아렌트나 샌델) 분기됩니다.

어떤 쪽이든, 반성적 자유에서 도출된 정의의 원리들은 유사합니다. 이들은 모두 개인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을 보증하기 위한 사회적 (외적) 배경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사 중반부에 등장하는 자유 개념은 반성적 자유 모델에 대입해야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유가 더 이상 '승자독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연대하며, 공동의 협력을 통해 '자유 실현을 위한 외적 조건들'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윤 대통령이 마음에 품고 있는 정의의 원리는 사회 전체의 협력을 위해 절차적으로 모두가 심의를 거쳐 공정한 사회 질서를 도모하는 것이 되거나, 진정한 자유 실현에 요구되는 적법한 사회 조건들을 위한 사회 체계적 개념을 숙고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윤석열 대통령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자유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두 가지 대비되는 '자유' 개념 때문에, '외적 간섭 없는 자유를 위한 주관적 권리 보장'과 '보편적 존중이 요구되는 자유를 위한 연대와 협력'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정의의 원리들을 한 바구니에 담게 됩니다.

이렇게 양립하기 어려운 자유 개념을 언급하는 윤 대통령의 의도를 제가 모두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적어도 (i) 보편적 가치로서 좋음이라는 '자유' 개념과 (ii) 개인의 좋음으로써 '자유' 개념을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유는 보편적 가치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연대해서 보편적 존중의 관점에서 이 좋음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개념 하나와, '자유는 그 자체로 외적 간섭 없이 개인의 좋음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개념 하나가 서로 충돌하면서 '외적 간섭이 배재된 개인의 자유를 위한 합의는 존중되고 법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입장'과, '자유에는 이 합의를 넘어선 연대와 박애 정신이 요구된다는 입장' 두 개가 대비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가 어찌 되었든 - 윤 대통령이 자유에 관한 개념에서 학습이 덜되어 있거나, 둘 중 내심 특정한 모델을 더 승인하면서도 국민 통합을 위해서든, 혹은 기타 다른 목적을 위해서든 본심을 숨기고 있거나 - 윤석열 대통령은 자유 개념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자의적으로 넘나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뭘 그렇게 따지고 드나. 말만 통하면 그만이지. 어쨌든 자유가 중요하다는 거 아니야."

물론 각자의 배경이나 전공에 따라 우리가 상상하는 '자유'의 개념은 상이할 수 있고, 이 개념을 다양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잘잘못을 따져낼 순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이것이 단순한 문제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윤 대통령의 '자유'를 둘러싼 개념적 불안정성이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여기서 가능한 앞으로의 여러 사회 갈등들을 제가 예단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윤 대통령이 자유를 '외적 간섭 없이 개인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것 (소극적 자유)'으로 승인하며,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 철폐, 비정규직 관련 법안 개정, 부동산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등을 자연스럽게 정당화할 때, '공동의 보편적 좋음으로써, 보편적 존중의 관점에서 추구되어야 하는 것 (반성적 자유)'으로서 자유 개념을 어떻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둘러싼 여러 논란들이 앞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갈등만 부추기며 남아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두 가지 상반된 자유 개념을 언급함으로써, 윤석열 대통령은 스스로 시험대에 올라섰습니다.

그리고 윤 대통령은 이 시험대에서 스스로에게 해결 불가능한 과제를 던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여러 정책과 행보를 둘러싼 윤석열 대통령의 자유 개념이 어떻게 안녕할지 저는 관심 있게 지켜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함께 그 과정에서 여러분의 자유 개념도 부디 안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 다음 회차인 Chapter 9. 에서는 소극적 자유와 반성적 자유의 여러 문제들에 맞서 호네트가 제안하는 '사회적 자유 (Social Freedom)'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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