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i generis Jun 29. 2022

Ch 14. 우리의 규범적 재구성 (I):법적 자유

법은 우리에게 상호 작용의 진정한 의미를 말해주지 않는다 

국내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자유의 권리(Freedom's Right)"를 해설하는 글입니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철학을 위해 제가 가장 먼저 "자유의 권리"를 연재하는 이유는 이 작업 안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도구가 담겨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꼭!! Chapter 1. 부터 읽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Prologue도 있긴 합니다). 감사합니다 :)



지난 Chapter들을 통해 저는 호네트가 생각하는 우리의 '좋은 삶', '자유', 그리고 '정의'와의 관계를 소개하고 부연 설명해 왔습니다.

호네트에게 우리의 좋은 삶은 개인의 자유, 혹은 자율성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가 보기에, 근대에서 발전된, 혹은 발견된 어떤 좋음에 관한 윤리적 이상이든 자유나 자율성이 의미하는 것에 추가적인, 혹은 부차적인 요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결국, 좋은 삶이란 결국 개인의 자율성과 관련된, 즉 각 개인이 자신만의 목적이나 삶의 기획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는 상태가 극대화된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우리의 좋은 삶에 관한 최고의 윤리적 가치는 '자유'입니다

#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해 주세요: https://brunch.co.kr/@2h4jus/4


그러나, 인류 역사 속에서 발전해 온 자유의 개념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호네트에 따르면, 서구 근대 사회의 "도덕적 담론 속에서, 자유의 의미에 대한 모진 갈등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우세했던 개인의 자유에 관한 사고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요. 그는 이들을 각각 (1) 소극적 자유 (Negative Freedom), (2) 반성적 자유 (Reflexive Freedom), 그리고 (3) 사회적 자유 (Soical Freedom)로 명명합니다. 

#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해 주세요: https://brunch.co.kr/@2h4jus/5


각각의 자유 모델은 스스로 품고 있는 자유에 관한 내용물을 토대로 정의에 관한 개념을 발전시켜왔습니다. 

따라서 자신만의 정의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시도 속에서, 호네트에겐 각 자유 모델의 내용과 여기에서 도출된 정의론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일이 요구됩니다.

호네트는 소극적 자유와 반성적 모두 우리 삶에 필수적이긴 해도, 그 내용이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자유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럽게 이 두 가지 모델에서 도출된 정의론 역시 호네트에게는 그 자체로 한계를 드러내며 문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지난 Chapter 4~8을 참조해 주세요.


호네트가 보기에, 우리의 좋은 삶을 형식화할 수 있는 가장 유망한 모델은 사회적 자유입니다.

즉 그는 인간이 아무리 외적 방해로부터 자유롭다고 해도 (소극적 자유), 그리고 자율적으로, 혹은 자기 진실적으로 정화된 의지로 행동한다고 해도 (반성적 자유),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발견될 수 있는 사회적 세계와 조화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자유로운 존재로 경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자유가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는 토대는 상호주관적인 인정의 제도들을 품고 있는 사회적 자유에 관한 사고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지요.

소극적 자유든, 반성적 자유든 이들이 진정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 실현을 보증하는 외적 현실, 혹은 객관 현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해 주세요: https://brunch.co.kr/@2h4jus/24


사회적 자유가 품고 있는 몇 가지 주요한 특징들을 토대로 이제 호네트는 자신만의 정의론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위해 지난 Chapter 10~11을 참조해 주세요.

간단히 말해서, 그에게 정의론의 과업이란 우리의 자유가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는 외적 현실, 혹은 객관 현실을 진단하고 분석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의는 "반드시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인정의 제도들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적법성은 각 행위의 영역들이 스스로 약속한 자유를 실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에서 구성원들에 참여를 보장하는가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지요.

이제 정의론은 기존의 순수하게 이상적이고 규범적인 원리들을 도출하고 이를 사회 현실에 2차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닌, 기존의 제도들과 관습들을 이들의 규범적 성취의 관점에서 진단하고 분석하며, 이러한 일상의 제도들과 관습들을 범주화하고 정렬하는 일이 됩니다.

이 과정을 호네트는 정의론을 위한 '규범적 재구성 (Normative Reconstruction)'이라고 명명합니다.

#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위해 지난 Chapter 12~13을 참조해 주세요.


각각의 사회 영역들 속에서 우리의 제도와 관습들이 각자의 가치들을 달성하고 실현하는데 해 온 공헌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호네트가 가장 먼저 다루는 영역은 우리의 '법적 자유'가 실현되는 법적 영역입니다. 

법적 영역은 우리의 주관적 관리가 성문화 된 장소로써, 우리가 자유의 실현을 위해 적법하게 설정된 공간 안에 있는 한, 우리의 자유를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행위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이 영역 속에서 우리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들의 주관성에 관한 깊이와 엹음을 탐구 (... can explore the depths and shallows of their subjectivity without fear of reproach)"할 수 있습니다 (악셀 호네트, 자유의 권리, 73).


제가 저의 맥북으로 자유롭게 글을 쓰는 이 행위는 법적으로 보장된 재산권과 표현의 자유를 통해 보장받고 보호받습니다. 

저는 이러한 저만의 자유로운 행위를 굳이 여러분에게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타인에 대한 어떤 의무나 애착에서 자유롭습니다.

저의 맥북을 활용해서 어떤 사회적 기대, 의무나 애착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이 맥북과 함께 제가 생산적으로 이 사회를 위해 이바지해야 한다던지, 나와 관련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던지 등의 의무나 애착은 자유의 이 법적 영역에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주관적인 법적 권리와 이 권리 속에서의 자유로운 행위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과 기대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허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법적 자유는 우리의 소극적 자유 (negative freedom)가 제도화된 영역입니다. 이 제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신념과 지향성, 삶의 목표나 방향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도하고자 하는 삶의 방식에 관해 우리의 신념을 형성하기 위한 제도적 조건"으로 법적 자유는 그 가치와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이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기 탐구의 과정은 크게 제한됩니다. 이 제도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겐 삶의 다양한 형태에 있어 "풍부하게 서로 대비되는 지평"을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이나 어떤 지적 동기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호네트는 법적 자유의 제도화가 갖는 가치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법적 자유가 자유의 영역으로써 자기 탐구를 보증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관적 권리가 우리를 우리 일상의 상호작용적인 의무들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기 이해와 삶의 전반적인 과정을 탐구할 수 있습니다.

즉 법적 자유는 우리에게 좋은 삶을 위한 사적 자율성의 공간을 보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각자의 좋음에 관한 다양한 개념들을 실험하고, 다양한 형태의 삶을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주관적 권리의 범주는 시대에 따라, 역사에 따라 더욱 정교하게 발전해 오면서 확장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평등주의에 기초한 모든 법적 질서, 각종 기술 발전을 따라 더욱 강화된 사생활의 법적 보장, 서로의 안전 보장을 위해 점차 엄격해지고 있는 국내 도로 교통법, 사적 공간의 보호를 위해 경제적 약자를 돕는 다양한 제도 등은 모두 개인의 사적 자율성의 범주를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제 우리는 법적 자유의 제도화 속에서 국가가 보증하는 주관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이 시점에서, 혹자는 이러한 사적 공간 보장을 위한 협의 자체가 공동의 저자로서 우리가 자유를 소극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협의 자체의 주요한 목적이 자신의 주관적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상호 간 의사소통은 단순히 목적-합리적 형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목적-합리적 형태의 의사소통은 호네트가 사회적 자유에서 강조했던 서로의 목적과 의도를 상호 호혜적으로 이해하고 승인하는 의사소통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후에 소개하겠지만, 호네트는 구성원들이 주관적 권리들로 구성된 사적 영역 안에 남아있는 한, 이들은 '자유의 수동적 수혜자'로 남게 되지만, 이 영역을 벗어나 정치적 권리로 향하게 되면 이들의 역할은 단순히 권리의 수신인이 아닌, 협력적 형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유의 권리를 위한 협력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사적 자율성과 집합적 자율성 간의 긴장으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자유의 제도화에 있어 그 한계는, 따라서 관련된 사회 병리들을 수반하게 되는 경우는, 자유가 전적으로 개인적 권리의 관점에서 파악되면서, 자유에 대한 개인의 배타적 호소가 사회적 관계에 있어 기존 구조들을 약화시킬 때 발생합니다.

# 호네트는 사회 이론의 관점에서 '사회 병리 (Social Pathology)'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사회적 협력의 중요한 형태들에 합리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크게 손상시키는 사회적 발전 (any social development that significantly impairs the ability to thake part rationally in important forms of social cooperation)" (Axel Honneth, Freedom's Right, 86).

#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사회 병리가 사회 부정의나 범죄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 병리는 우리의 모든 제도적 체계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제도화의 합리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잘못 이해할 때마다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즉 사회 병리란 사회 구성원들이 이러한 행위 체계의 사회적 가치를 구성하는 규칙들을 따르기보다는, 이 규칙들의 사회적 의미를 오독하여 해석하는 현상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먼저 법적 자유의 한계를 짚어보겠습니다.

법적으로 보장된 주관적 권리 속에서, 완전한 privacy 안에서, 법적 자유를 자유 그 자체에 있어 최고의 이상으로 이해하고 여기에 몰두하는 인물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는/그녀는 이 보호적 장벽 뒤에서 자신의 삶의 위해 무엇이 좋고 옳은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그녀가 좋음으로써 자신만의 삶의 기획을 위해, 하루에 한 번 나체로 해변가를 활보하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나 이 결정이 진정한 자유로운 행위의 실현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하는데요. 그는/그녀는 이 결정에 대한 이유를 나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이들에게 제공해야 하고, 반대로 이들은 그의/그녀의 결정을 승인해야 합니다.

이 승인이 더욱 보편적인 좋음에 관한 관점을 대표하게 된다면, 그때서야 이는 법으로 성문화 될 것입니다.

이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그녀는 "의사 결정의 진공" 상태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거의 완전한 "비 규정성의 상태"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사례는 거의 모든 좋음에 관한 가치에서 동일합니다.

새로운 좋음에 관한 개념을 발견하거나, 혹은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그리고 이를 형식화하기 위해 우리는 서로와의 상호주관적 의무와 애착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의무는 서로를 향한 최소한의 애착과 의존성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최소한의 애착과 의존성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나의 좋음을 승인받을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의 결정이 좋음으로써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러한 상호주관적 의무를 받아들여야 하고, 여기서 최소한의 애착과 의존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를 간과한 채, 우리의 주관적 권리만을 밀고 간다는 것은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중단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속세와 떨어져 홀로 자연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우리의 상호주관적 의무는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주관적 권리가 형식화된 법적 영역에서 우리가 소극적 자유를 실현해 나갈 때, 이 영역은 "단지 좋음에 관한 우리의 기존 개념을 관찰하고 재심의하는 역할만 수행하고, 새로운 개념들을 발전시키거나 형식화하는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악셀 호네트, 자유의 권리, 84).

각자가 국가가 법으로 보장한 사적 공간에서 자신만의 좋음이나 삶의 형태를 도모할 때, 결국 이것이 좋음이 될 수 있는지, 혹은 삶의 형태가 될 수 있는지 여부는 사회적 공간 속에 편입되고서야 그 의미가 드러나게 되고, 그 적법성은 서로 간의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평가되는 것이지요.

궁극적으로 한 개인이 자신의 결과적 확신이나 이상에 기반해 행동하고자 한다면, 그는/그녀는 사회적 관습의 흐름 속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타인과의 일상적인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서 다양한 (좋음에 관한) 윤리적 가능성들을 시험하고, 이행하며 자기실현을 (자유의 실현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Master-slave Dialectic)'의 핵심적 사고이고, 호네트가 인정 이론에서 강조한 내용입니다.

상호주관성 없이는 그 어떤 실제적인 윤리적 자율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We cannot pursue any life aims or take part in any interactions unless we have already exited the sphere of legal freedom and accepted the intersubjective obligation to justify our decisions. In our everyday communicative action, we cannot merely invoke personal freedom in order to reject pleas or demands that we offer reasons for our decisions. Although in the lifeworld we normally act on reasons that we share pre-reflectively with our partners in interaction, as soon as we dissent, we are obligated to explain why. In these situations, exercising our subjective rights would mean breaking off communication; we would then no longer trust that a discussion of conflicting reasons is capable of repairing unsuccessful interaction, and we would thus invoke our right to act on our subjective reasons alone.

(Axel Honneth, Freedom's Right, 84-85).


우리가 우리의 결정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법적 자유의 영역을 이미 빠져나와 상호주관적 의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느 삶의 목표들을 추구하거나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없다. 우리 일상의 의사소통적 행위 속에서, 우리는 우리 결정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라는 청원이나(pleas) 요구를 거부하기 위해 단순히 사적 자유에 호소할 수 없다. 생활세계 속에서, 우리가 보통 상호작용의 파트너들과 반성 이전적으로(pre-reflectively) 공유한 이유들에 따라 행동하긴 해도, 이를 거부하자마자, 우리는 그 이유를 설명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우리의 주관적 권리들을 시행한다는 것은 의사소통을 중단한다는 것을(breaking off) 의미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 대립하는 이유들에 관한 논의가 성공적이지 않은 상호작용을 교정할 수 있다는 점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우리의 주관적 이유들에 따라 행동할 우리의 권리에만 호소할 것이다.

(악셀 호네트, 자유의 권리, 84-85).



이처럼 우리가 법적 자유를 극대화한다면, 각자의 "삶의 목표들을 실현하기 위해 요구되는 일종의 반성이나 활동"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법적 영역 안에서 법적 자유에 충실한 이들은 상호작용 속 파트너들을 자신들의 주요한 삶의 목적들을 공동으로 윤리적 자율성이 요구하는 방식에서 회고하거나 실현하는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단지 전략적 이익을 가진 행위자들"로 인지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법적 자유에서 발생하는 사회 병리들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의 사회 병리들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적절한 도구를 제공해 줍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병리는 체제 자체가 아닌, 구성원들이 체제의 합리성을 잘못 이해하는 방식에서 발생합니다.

따라서 법적 자유의 병리는 법적 영역이나 체제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보다, 이 영역에서의 사회 병리는 바로 이 체제가 가진 정당성이나 합리성의 왜곡된 해석에서 발생하는 것이지요.

살펴본 것처럼, 주관적 권리가 형식화된 법적 영역에서 우리가 소극적 자유를 실현해 나갈 때, 이 영역의 주요한 목적은 "좋음에 관한 우리의 기존 개념을 관찰하고 재심의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법적 자유를 자유의 총체로 이해하고, 즉 모든 자유가 여기에 수렴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자신의 자아 관계를 위한 배타적인 참조점"으로 여기게 된다면, 여기서 사회 병리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 병리는 현대 사회에, 특히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사회적 논쟁이나 갈등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최근 한국 사회는 세대 간 갈등, 성별 간 갈등, 정치적 성향에 따른 지지자들 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갈등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저는 이러한 현상 속에서 법적 자유를 극대화하는 개개인들로부터 발생하는 사회 병리를 목격합니다.

즉 저는 모두가 주관적 권리의 전달자로서 우리 역할에 배타적으로 초점을 맞춘 채,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한 중재를 위한 잠재성을, 따라서 종종 논쟁의 본래 이유를 시야에서 놓치게 되는 강력한 경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으로 인해, 우리의 자유는 개인의 주관적 권리의 총량으로 환원되고, 우리 행위의 수단은 그 자체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이 됩니다.

상호 간의 어떤 의무나 애착은 이 과정에서 사라지고, 이제 각자가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는 데 있어 점차 어려워지는 모델인 법적 자유의 기능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법적 자유의 정당성을 "모든 의사소통적 요구들로부터 일시적으로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전적으로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기회로 여기기" 보다는, 의사소통의 중단을 통해 타자와의 모든 추가적인 상호작용을 이 영역에서만 매듭짓고자 하는 방식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전에 공유된 가치들, 규범들 그리고 관습들에 의존함으로써" 서로 합의에 이르렀던 과정은 한국 사회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점차 법의 도움과 함께 타자에 맞서 우리의 이익을 성공적으로 밀고 나가기 위해 전략적 입장"을 취하며, 특정한 사회적 논쟁이나 갈등이 법적 다툼으로 이어질 경우, "법정에서의 전망들을 높이기 위해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을 점차 조절하고, 따라서 점진적으로 법적 용어들 속에서 표명될 수 없는 문제들과 의도의 감각"을 잃고 있습니다.

각종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사회. 갈등을 상호 간 애착과 의무를 통해 해결하는 것보다, 자신의 주관적 권리를 극대화하여 법에 호소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그러면서 이미 존재했던 모든 공유된 가치들, 규범들, 관습들은 고루한 유산이 되고, 모두가 전략적인 인간이 된 채, 타인을 마찬가지로 그런 전략적인 인간으로 대하는 사회. 그런 와중에 모두가 집단 우울감과 혼란스러움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회. 지금의 한국 사회의 모습인 것이지요.




What has been always regarded as one of the downsides of increasing legal codification is the fact that the juridification of communicative areas of life subtly compels subjects, both the directly and the indirectly affected, to take up an objectifying stance toward their highly individuated interaction. By subordinating the lifeworld under the medium of the law, subjects are forced to abstract from their concrete experiences and recognize their needs only to the extent that they fit into the schema of generally typified interests, thus undermining overall communicative life. As soon as this compulsion to abstract pushes out beyond the courtroom and takes hold in everyday social life, subjects learn to observe their own intentions and those of their peers solely in terms of their legal import. They lose the ability to distinguish between the strategic foreground and the lifeworld background, and what remains of the person is but a sum of legal claims. This shift of attitudes ultimately leads to the belief that my freedom and that of all others only extends as far as is allowed given the abstraction demanded by a legal perspective; my freedom thus cannot reach beyond the typifying descriptive borders of the law. Instead of individualized needs, we assert only universal interests; instead of routine norms and values, we resort to principles of legal conformity; instead of settling conflicts through communication, we immediately resort to judicial arbitration.

(Axel Honneth, Freedom's Right, 90).


증가하는 법적 성문화의 문제들 중 하나로서 항상 여겨져 왔던 것은 삶의 의사소통적 영역의 사법화가 여기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 주체들로 하여금 매우 개인화된 상호작용을 향해 객관화된 입장을 미묘하게 취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생활세계를 법의 매개체 아래로 종속시킴으로써, 주체들은 자신들의 분명한 경험으로부터 멀어지고, 자신들의 욕구가 단지 일반적으로 정형화된 관심의 기획 속에 일치하는 범주까지 이 욕구들을 인지할 수 있게 되며, 결국 전반적인 의사소통적 삶을 약화시키는 지경에 이른다. 추상화를 향한 이 압박이 법정을 벗어나 일상의 사회적 삶 속에서 자리 잡게 되자마자, 주체들은 자신들만의 의도, 그리고 동료들의 의도를 단지 이들의 법적 의미의 관점에서 관찰하는 법을 학습한다. 이들은 전략적 전경과 생활세계의 배경 사이를 구분하는 능력을 잃게 되고, person에 관해 남아있는 것은 단순히 법적 주장들의 총합이다. 이 태도의 전환은 결국 나의 자유와 모든 타인의 자유가 단지 법적 관점이 요구하는 추상화를 고려하여 허용되는 한에서만 확장된다는 신념을 야기한다; 따라서 나의 자유는 법의 묘사적 경계들을 정형화하는 것 너머에 닿을 수 없다. 개인화된 욕구 대신에, 우리는 단지 보편적인 관심들만을 주장한다; 일상적인 규범들과 가치들 대신에, 우리는 법의 일치성이라는 원리들에 의존한다; 의사소통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것 대신, 우리는 즉각적으로 사법적 조정에 의존한다.

(악셀 호네트, 자유의 권리, 90).



요약해 보면, 호네트에게 법적 자유가 제도화되고 실현되는 법적 영역은 단순히 제한적인 기능만을 담당합니다: 일상의 상호작용적인 의무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면서, 우리에게 진정한 자기 이해와 삶의 전반적인 과정을 탐구할 수 있게 한다.

법적 자유의 한계는 우리를 상호주관적 의무나 애착에서 멀어지게 하면서, 이전에 공유된 가치들, 규범들 그리고 관습들을 재생산해 나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상호 간 의사소통을 차단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발생하는 병리적 현상이란, 누군가 법적 자유를 자유의 총체로 이해하면서 자아 관계를 위한 배타적인 참조점으로 소극적 자유를 승인하고, 우리의 모든 관계망을 법적인, 전략적인 태도들로 채색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법적 자유의 병리적인 현상은 한국 사회에도 만연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네트에게 법적 자유의 영역은 사회적 자유의 진정한 영역이 될 수 없습니다.


# 최근 우리는 검찰 출신의 정치 경험이 거의 전무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러 경로를 통해 '법치주의 (Legalism)'를 강조합니다.

각종 갈등이나 논쟁의 여러 현안을 위한 해결책으로 법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전 대통령 사저 앞 시위, 화물 노조 문제 등), 심지어 외교 문제조차도 법치적으로 접근하면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우리 모두의 좋은 삶을 위해 앞으로 상당한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저는 또한 우리가 선출한 대통령이 자유를 오직 법적 영역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환원하고 이해하면서, 우리의 상호 간 애착과 의무를 진공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습니다.

또한, 법적 자유와 관련된 병리적인 현상이 우리 눈앞에 분명히 시각화되어있다면, 여기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역할을 무엇일까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상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실천할 수 있는 소소한 일은 나와 뜻이 같지 않은 상대에 대한 비하와 조롱을 멈추는 일은 아닐까요?

비하와 조롱의 표현은 분명 각자의 주관적 권리만이 극대화된 표현입니다.



> 다음 회에서는 반성적 자유가 제도화된 도덕적 영역에 관한 호네트의 진단과 분석을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전 15화 Chapter 13. 사회적 자유 V-규범적 재구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