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 가능한 도덕적 원리는 언제나 사회 현실 뒤에 있다
국내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자유의 권리(Freedom's Right)"를 해설하는 글입니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철학을 위해 제가 가장 먼저 "자유의 권리"를 연재하는 이유는 이 작업 안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도구가 담겨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꼭!! Chapter 1. 부터 읽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Prologue도 있긴 합니다). 감사합니다 :)
Chapter 14. 에서 살펴본 것 처럼, 우리의 소극적 자유가 제도화된 영역은 바로 법적 자유의 영역입니다.
법적 자유의 영역에서 우리는 주변의 타인을 향한 의무나 애착에서 독립적으로, 우리만의 진정한 자기 이해를 탐구하고, 우리의 신념과 지향성, 삶의 목표나 방향성 등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법으로 보장된 이 제도화된 자유는 우리에게 좋은 삶을 위한 사적 자율성의 공간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관적 권리가 형식화된 이 법적 영역을 '자유의 모든 것', 혹은 '자유의 총체'로 이해하게 된다면, 여기서 발생하는 사회 병리들에 직면하게 되고, 이는 사회 구석구석에 사실로 남아있습니다.
즉 법적 자유의 영역을 "모든 의사소통적 요구들로부터 일시적으로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전적으로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기회"로 여기기 보다는 (호네트에 따르면, 이것이 법적 자유가 가진 유일한 기능이자 정당성 입니다), 의사소통의 중단을 통해 타자와의 다양한 추가적인 상호작용을 이 영역에서만 매듭짓고자 하는 형태로 오인할 때, 우리는 서로를 향해 전략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입장만을 고수하며, 기존에 공유되었던 규범적 가치들과 관습들을 유지하고 재생산 해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병리들은 만연해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법적 영역에서 보장되는 주관적 권리만을 자유의 총합으로 이해한 채, 그리고 법적 기능만을 강조한 채 (심지어 새로 선출된 대통령 조차도), 여러 현안에 의사소통을 통한 합의에 이르기 보다는, 각 정치적 진영, 성별, 세대 간으로 분리되어 서로를 향한 애착과 의무를 점차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타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나'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만성적인 분노와 불안, 우울감과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회는 분명 (헤겔과 호네트의 용어를 따라) 우리의 '윤리적 삶 (Sittlichkeit, Ethical Life)'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 처럼, 법적 자유의 경계는 '모든 의사소통적 요구들로부터 일시적으로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전적으로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기회' 까지만 설정되어야 합니다.
구성원들이 이 경계를 벗어나 자유를 이해하고 실행한다면, 우리는 좋은 삶과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우리의 자유가 실현되어 온 제도와 관습들을 규범적으로 재구성할 때, 호네트가 포착한 두 번째 영역은 바로 우리의 반성적 자유가 제도화된 도덕적 자유의 영역 입니다.
자유의 도덕적 영역은 특히 반성적 자유의 자율성 측면에서 우리 사회에 제도화 되어 있는데요.
즉 도덕적 영역은 개인이 반성적으로 자신들의 상호적 관계들이 보편적인 도덕성의 관점에서 정당화 될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 일상의 얽힘에서 한 발짝 물러설 수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지식의 체계 뿐만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관한 판단, 상호주관적 인정의 구조에 기반한 규범, 상호간의 역할, 그리고 의무까지 우리는 기존에 공유되었던 모든 서로 간의 체계들을 이 도덕적 영역 안에서 회고해보고 탐구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도덕적 영역은 법적 영역처럼 우리 사회 속에서 행위의 영역이 강력하게 법적으로 보장된 제도의 체계는 아닙니다.
도덕 법칙은 국가가 강제적인 조치들을 통해 통제하거나 규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도덕적 자율성의 개념이 제도화된 이 도덕적 자유의 영역은 "약하게 제도화된 문화적 패턴 (a weakly institutionalised cultural pattern, Axel Honneth, Freedom's Right, 96)"으로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법적 영역에서는 국가에 의해 보장되고 시행되는 범주 속에서 우리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물러설 수있었지만, 도덕적 영역에서는 이와 무관하게 문화에 의해 부여된 상호주관적 의무들로부터 잠시 멀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게 된 것입니다.
일종의 성문화되지 않은 자유의 실행으로써, 우리는 도덕적 자유 영역에서 우리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는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도 아닐 뿐더러, 보편적인 상식이나 규범에서도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인간의 기본권의 관점에서,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그리고 인류애적 관점에서, 이분들의 권리와 자유가 국가에 의해 부당하게 침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숙고할 때, 그리고 이분들의 권리와 자유가 보편적이고 전형적이 될 수 있는 집합적 합의에 이를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할 때, 저는 도덕적 영역 안에서 사회적 삶의 요구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이분들의 요구에 관해 윤리적-도덕적 판단을 가늠해 보며 저의 (도덕적) 자유를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덕적 영역을 통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윤리적 이상이나 가치를 변화시켜 왔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남성 중심의 관료주의는 점차 희미해지고 있고, 모든 가부장적 제도는 이제 거의 폐기 수준에 가까워졌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여성의 역할을 특정 범주 안에서 제한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며, (이전에는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우리가 선택할 수 없었던 것들이 (집안 배경, 성별, 국가, 인종 등등) 우리 삶에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살펴보게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도덕적 영역은 또한 윤리적 이상이나 가치들에 관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다양한 의견과 논쟁이 교류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낙태법 문제, 노동 시간이나 최저 임금 문제, 사형제 존치 문제, 그리고 소위 '엄빠 찬스' 등은 모두 이 영역에서 논의되고 다루어지는 문제들 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도덕적 영역에서 타인과 상호 호혜적 정당성의 관습들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규범들이, 혹은 윤리적-도덕적 가치들이 더욱 보편적일 수 있는지를 판단합니다.
그리고, 이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식에서 더 이상 수용될 수 없다고 여기는, 그래서 부당하거나 부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윤리적-도덕적 요구들을 추출하여 논쟁에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덕적 영역은 기존 사회 질서나 규범들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우리의 반성적 자유가 실현되는 장소입니다.
호네트가 보기에, 도덕적 자유가 실행되는 영역은 앞서 언급한 모든 개인의 반성적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공간일 때 그 의미와 적법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역은 모든 개개인이 역할을 수행하고 의무를 수용하는 사회적 요구들을 정당하게 거부할 수 있는 주관적 입장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because it recognises a subjective standce in which every indiidual can justifiably reject social demands to take on roles and accept obligations, Ibid., 96)."
도덕적 자유는 우리가 "기존의 관계들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거부할 수 있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정당화된 방식에서 기존의 규범 체계들을 넘어설 수 있는 지적 역량을 부여" 합니다 ("the moral conception of freedom... not only enables subjects to view themselves as capable of rejecting existing relations as 'irrational', but also grants them the intellectual capacity to go beyond given systems of norms in a justified fashion, Ibid., 104).
이제 우리는, 도덕적 자유 덕분에 (사실 그 안의 강력한 자기 입법의 개념 덕분에), "자유라는 이름 속에서 기존의 규범들에 반대할 수 있고, 구성적으로 새로운 규범 체계들을 제안할 수 있는 관점을 채택할 권한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 empowered in the name of freedom to adopt a perspective from which they can oppose existing norms and constructively propose new systems of norms, Ibid.).
그러나 법적 자유의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호네트는 우리가 자유를 도덕적 영역 속에서 도덕적 자유의 실현으로만 이해할 경우, 즉 자유를 도덕적 자율성의 관점에서 절대화 할 경우 발생하는 문제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법적 자유의 영역에서 발생했던 것과는 또 다른 사회 병리들을 야기하게 됩니다.
예외 없이, 여기서 발생하는 사회 병리들은, 법적 자유에서 발생한 사회 병리들처럼,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우선 호네트가 생각하는 도덕적 자유의 한계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법적 영역에서 처럼, 도덕적 영역은 단순히 (그 실현이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자유의 잠재적인 영역인데, "사회적 얽힘으로부터 반성적 분리의 순간이 구성적으로 분리 이전의 사회 맥락 속에서 새겨져 있는 것에 의존하는 한 도덕성은 본질적으로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Christopher F. Zurn, Axel Honneth, 170).
역시나 철학자들의 글이나 이를 해설하는 2차 문헌은 한번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제가 도덕적 자유의 한계를 좀 더 쉽게 풀어 써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 처럼, 도덕적 자유의 영역에서 우리는 서로 대립하는, 혹은 서로 경쟁하는 다양한 가치 판단이 가능한 윤리적-도덕적 규범들이나 사회 질서를 향해, 기존의 관계에서 한 발 물러서서 이들을 반성적으로 회고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부 편향되거나 왜곡된 기존의 규범들이나 사회 질서들을 일정 수준까지 공평 무사한 관점까지 끌고와서 추상화하거나 일부 구체화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이렇게 시도된 기존 가치들을 향한 추상화나 (일부) 구체화가 이미 확립되어 있는 사회적 의미, 그리고 이 행위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의 동기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의 윤리적-도덕적 평가의 과정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항상 이미 받아들이는 규칙들과 기존의 사회 세계의 관습들에 의존합니다.
다시 동성애를 예로 들면, 저는 도덕적 영역 안에서 전통적인 성 관념이나 생물학적, 종교적, 그리고 질병적인 이유 등으로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 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해 윤리적-도덕적 판단을 반성적으로 숙고해 보고, 가능한 공평 무사한 관점에서 이분들의 권리나 자유, 그리고 도덕적 원리들의 보편 가능성을 판단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의 (도덕적 혹은 반성적) 자유의 실현은 멈추게 되는데요. 제가 동성애와 관련해서 반성적으로 숙고한 모든 내용들이 실제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용인하거나 수용 가능한 규범이 저의 (반성적, 혹은 도덕적) 자유의 실현과 얼마 간은 일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영역 안에서 저는 동성애에 관한 보편 가능성을 중립적으로 고찰해 보는 수준까지 향해가며 저의 반성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습이나 규범과 분리된 채, 기존에 구성원들끼리 공유했던 애착과 의무와 관계에서 완전히 독립적으로 제가 동성애와 관련해 도출해낸 보편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는 없는 노릇 인 것이지요.
"서로에게 자신들의 사회적 관습 속 이러한 관점을 귀속시키는 주체들에게 있어, 이는 이들의 개인적 자유가 시험될 수 있고 '논의될 수' 있지만, 실현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For the subjects that ascribe to each other such a perspective in their social practices, this means that their individual freedom can be tested and 'ventilated', but not realised)" (Axel Honneth, Freedom's Right, 108).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자유를 위해, 서로 간의 구체적인 애착들로부터, 따라서 의무들로부터 잠시 분리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속한 제도적 배열로부터는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도덕적 영역 속 도덕적 자유의 실현을 통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윤리적 이상이나 가치를 변화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이 변화까지는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 필수적이며, 이 투쟁의 과정에서 잊혀진 인물들과 이름들이 우리 역사 속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사회의 생활 세계의 전형(epitome)으로 여길 수 있는 외관은 언제나 사회적 상상 이후에나 모습을 드러내고, 이 상상은 치열한, 그리고 때로는 과격한 투쟁의 역사를 반드시 수반해야 합니다.
이를 저만의 용어대로 설명하자면, "도덕적 자유 속 모든 보편 가능성의 원리는 인류 역사의 투쟁이 성공적으로 그 임무를 완수한 이후에야 비로소 실현 가능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 입니다.
이와 관련한 우리 사회의 비근한 예로는, '검수 완박'을 들 수 있겠습니다. 많은 국민은 검찰 권력에 대한 개혁에 공감합니다. 검찰 기관에는 필요 이상의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이로 인해 우리는 수 많은 검찰 권력의 피해자들을 목격해 왔습니다.
따라서 '검찰 개혁'에 대한 숙고는 분명 우리의 반성적 자유를 통해 도덕적 영역에서 실현된 산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상상한 검찰 개혁이 실제 실현되기 까지는, 즉 우리의 도덕적 자유가 실제 실현되기 까지는 우리는 얼마간의 투쟁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최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검수 완박' 법안에 헌법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송은 검찰 개혁과 관련한 우리의 도덕적 자유가 실제 실현되기 까지의, 즉 검찰 개혁이 가능한 우리 사회의 생활 세계의 전형이 눈앞에 드러나기 까지의 지난한 투쟁 과정의 서막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도덕적 영역 안에서 우리의 도덕적 (혹은 반성적) 자유를 실행하며 행위의 원리들을 완전히 결정할 수 없습니다.
도덕적 영역에서 실행되는 도덕적 자유의 한계는 이제 우리에게 도덕적 자유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병리들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지난 Chapter에서 설명한 것 처럼, 사회 병리는 사회 부정의나 범죄와 구별됩니다.
사회 병리란 우리 사회의 행위 체제나 제도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이 체제나 제도를 구성원들이 잘못 이해할 때 마다 발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구성원들이 이러한 행위 체계나 제도의 사회적 가치를 구성하는 규칙을 따르는 대신, 이 규칙들의 사회적 의미를 일탈적으로 해석하고 자신들의 행위에 반영하게 될 때 사회 병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맥락에서 호네트가 지적하는 도덕적 자유 속 사회 병리들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각 구성원의 견고한 혹은 억제되지 않은 도덕주의는(moralism) 도덕적 자유의 병리를 상징합니다.
"서로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항상 이미 우리가 의지대로 통제할 수 없는 행위의 규범들로 규제 (Ibid., 113)" 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누군가 자신의 행위 원리들을 전적으로 보편 가능성의 관점에서 밀고 나갈 때, 우리는 견고한 혹은 억제되지 않은 도덕주의를 목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도덕적 자기 입법 행위 자체를 잘못 이해하게 되면서, 누군가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도덕성의 최고 자리에 올려놓게 됩니다.
일상적 규범의 사실성을 간과한 채, 스스로를 공정한, 혹은 올바른 세상의 입법자로 여기면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을 제거해야 할 박멸의 대상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들에게, 이제 상대는 우리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할, 사회적 상호작용의 규범들의 대상으로 인식되기 보다는, 쓰레기로, 빨갱이로, 친일파로, 틀딱으로, 일베로, 이대남-이대녀로, 꼴패미로, 그리고 수박으로 그들의 인식 속에 구조화 됩니다.
견고한 혹은 억제되지 않은 도덕주의에 빠진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위한 이유를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규범들이 완전히 무효가 되는 보편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하고자 하기 때문에, 도덕적 특질의 캐릭터 가면이 됩니다 (They become character masks of a moral ethos, because they attempt to determine their reasons for action from a universalist perpsective for which already existing norms of social interaction are entirely invalid)" (Ibid., 114).
도덕주의는 자기 입법적 주체들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 속의 애착과 의무를 더 이상 수용하지 않게 될 때 마다 발생합니다.
도덕적 자유의 두 번째 병리는 (일종의 첫 번째 병리를 먹고 자란 환상으로써) 도덕성을 자신의 도덕적 목적을 달성하는 어떤 수단으로 활용할 때 발생하고, 이 병리 현상은 주로 (도덕적 혹은 정치적인) 집합적 테러리즘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회 집단이 지배적인 사회 질서의 적법성에 도덕적 의구심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모든 기존의 규칙들에 의구심을 제기하며 전복을 희망하는 수준까지 이어질 때, 이들은 한 가지 강력한 관점을 공유하게 됩니다: "모든 기존의 제도적 배치가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범주까지, 모든 잠재적 희생자들의 이익은 일반화 될 수 있다 (the interest of all potential victims can be generalised to an extent that every given institutional arrangement can be viewed as unjustified. Ibid., 118).
여기서 "일단 도덕적 심의가 기존 사회의 제도적 토대로부터 분리되면, 참여자들은 모든 수단을 부당한 사회 질서에 맞서기 위해 도덕적으로 정당화 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독일의 나치가 대표적으로 이 집합적 테러리즘의 병리로 상징됩니다.
반드시 전쟁과 같은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테러리즘의 형태는 더욱 세심하게 목록화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패권적 세계 질서, 신자유주의의자들의 지배적 위치 등).
한국 사회에 한정해 본다면, 집합적 테러레즘의 사례로는 재벌 중심의 경제 체제와 이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특정 정치 집단의 노력을 들 수 있겠습니다.
재벌로 대표되는 한국의 경제 구조와 이를 유지하고 재생산 하기 위해 특정 정치 집단이 그동안 기울여온 정책적 뒷받침 속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자들이 있어왔는지를 고려해 본다면, 그리고 앞으로도 잠재적 희생자들을 예상해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포괄적으로) 이러한 행태를 한국식 경제적 테러리즘으로 논의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요약해 보면, 도덕적 영역은 우리에게 생활세계 속 규범들의 지배적인 해석에 맞서 한 발 물러서 공적으로 의구심을 표명할 수 있게 해 주는, 그래서 기존 사회의 변화에 공헌할 수 있게 해 주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 적법성과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도덕적 영역 속에서 우리의 도덕적 (혹은 반성적) 자유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도덕적 자유는 실제 우리의 도덕적 (혹은 반성적) 자유가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맥락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제한적입니다. 도덕적 자유의 실행을 통해 도출된 보편 가능한, 공평 무사한 윤리적-도덕적 원리들이 가능한 사회 세계의 관습과 제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까지는 지난한 투쟁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적 영역이 갖는 의미와 적법성을 너머, 이 영역의 경계를 너머, 여기서 가능한 자유를 잘못 이해하게 된다면, (i) 견고한 혹은 억제되지 않은 도덕주의, (ii) 집합적 테러리즘과 같은 사회 병리들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병리들은 앞서 살펴본 것 처럼,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좋은 삶을 불완전하고 불충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 다음 회에서는, 호네트의 설명을 따라, 우리의 진정한 좋은 삶, 윤리적 삶을 위해 제도화된 사회적 자유의 영역들을 (순차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