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문법: 규범적 원천의 잉여
국내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의 "자유의 권리(Freedom's Right)"를 해설하는 글입니다. 현실을 들여다보는 철학을 위해 제가 가장 먼저 "자유의 권리"를 연재하는 이유는 이 작업 안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분석하고 해결할 수 있는 도구가 담겨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서는 꼭!! Chapter 1. 부터 읽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Prologue도 있긴 합니다). 감사합니다 :)
Chapter 14, 그리고 15. 에서 살펴본 것처럼, 호네트는 역사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관한 사고가 행위를 위해 분명하게 제도화된 영역으로 (i) 법적 영역과 (ii) 도덕적 영역을 발견하여, 소개하고, 분석했습니다.
즉 호네트는 인류가 '자유'라는 사고 주변에서 발전시켜온 여러 개념들이 실제 각 개인의 행위를 위한 영역으로 제도화된 영역으로써 (i) 소극적 자유 모델이 제도화된 법적 영역, 그리고 (ii) 반성적 자유 모델이 제도화된 도덕적 영역을 제시하고 이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호네트에게, 각 영역은 우리의 좋은 삶을 위해 필수적인 영역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영역들에서 우리는 '사회적 현실성(social reality)'를 달성해 왔습니다.
법적 영역에서 법으로 보장된 주관적 권리를 통해, 우리는 어떤 사회적 역할이나 기대로부터 잠시 떨어져서, 우리의 다양한 삶의 목표와 기획, 그리고 자기 이해를 '외적 방해 없이' 탐구할 수 있습니다. 법적 자유는 우리에게 좋은 삶을 위한 사적 자율성의 공간을 제공하고 보장합니다.
(참조: https://brunch.co.kr/@2h4jus/30)
법적 영역이 우리에게, 법의 원조 아래, '외적 방해 없이' 개인적 좋음을 추구하기 위한 사적 공간을 제공했다면, 도덕적 영역은 우리에게 타인과의 일상적 상호작용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즉 도덕적 영역은 우리가 반성적으로, 혹은 회고적으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있는 (지식을 포함한) 다양한 도덕적 판단의 보편성에 대해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영역에서 우리는 우리의 반성적 자유를 실현하며, 문화나 관습, 제도들이 부여한 다양한 상호주관적 의무들로부터 잠시 떨어져 이들의 보편 타당성을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의 도덕적 영역은 우리 사회에서 법적으로 성문화 된 공간이 아닌, '약하게 제도화된 문화적 패턴'으로 남아있습니다.
(참조: https://brunch.co.kr/@2h4jus/32)
그럼에도, 호네트에게 이 법적 영역과 도덕적 영역은 우리 삶에 필수적이긴 해도, 우리의 좋은 삶을 위해 불충분하고 불완전한 공간으로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역들은 사적 좋음을 위해 "기존의 상호 작용의 관계들을 관찰"하고, "거부"하거나 혹은 "여기서 분리될 수 있는 기회들"을 제공하지만, "사회 세계 속에서 상호주관적으로 공유된 현실" 자체를 형성하지는 않기 때문인 것이지요 (호네트, 자유의 권리, 123-124).
제가 사회적 자유 Chapter들에서 소개한 것처럼, 호네트에게 진정한 자유란 우리가 서로를 "상호 인정 속에서 마주하고, 우리의 행위를 타자의 목적을 충족하기 위한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실재를 드러냅니다 (Ibid., 124).
그리고 이러한 상호 인정이 새겨진 제도적 복합체들은 법적 영역이나 도덕적 영역보다는, 우리가 '사회적' 혹은 '객관적'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가 실현되는 영역들을 통해서만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참조: https://brunch.co.kr/@2h4jus/24, https://brunch.co.kr/@2h4jus/25, https://brunch.co.kr/@2h4jus/20)
호네트에게, 법적 자유나 도덕 자유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행위는 그 자체로 우리의 목적들을 실현하거나 구체화하는 역할보다는, 단지 사회적 얽힘과 떨어진 곳에서 이 목적들을 관찰하거나 이행하는, 그리고 이 관찰이나 이행이 다른 이들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는가 여부만을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입니다 (Ibid., 124).
따라서 우리의 목적이 완전히 실현되는 영역들, 즉 "타자들이 우리 모두가 상호 간 인정 속에서 함축적으로 이행해 온 규범에 따라 행동" (Ibid., 125) 해 온 영역들은 법적 영역이나 도덕적 영역과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즉 "개인의 자유는 보완적 역할 의무들로 표현되는 제도적 복합체 속에서만 사회적으로 경험되고 살아있는 현실이 될 수 있는 반면, 법과 도덕성은 '공식적인' 영역들 속에서 단지 분리나 반성적 관찰의 수단으로써 역할"만을 담당합니다 (Ibid., 127).
우리의 의도나 목적이 타자들의 의도나 목적 속에서 형식화되고 시행될 수 있는 영역들을 호네트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사적 관계 (Personal Relationships)," "시장 경제 (Market Economy)," 그리고 "민주적 의지 형성 (democratic Will-formation)."
그리고 호네트에겐 이 제도들만이 진정한 자유의 실재를 대표하는 윤리적 영역들입니다.
이 영역들 속에서 우리는 상호 인정의 규범들을 따라 주체들이 협력적으로 함께 좋은 삶을 위해 진정한 자유를 수행하고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지요.
호네트는 이러한 영역들이 '관계적' 행위의 체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역에서 각 구성원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도덕적 배려를 잊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의무의 당위성이 지배적이지 않은 사회적 역할의 행위들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호네트에게, 우리의 진정한 자유를 보장하는 "현재의 사회관계들 속에서 자유의 '실재'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하고, 이 사회관계들의 정당성, 즉 우리의 (사회) 정의론을 위해 "상호 간 보완적인 역할 의무들이 개개인은 서로의 자유로운 행위들을 자신만의 목적 실현을 위한 조건들로 인지할 수 있다는 점을 보증하는 행위의 영역들"을 규범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게 된 것입니다 (Ibid.).
호네트가 제시하는 자유의 실재로서, 그리고 우리의 상호 간 보완적인 역할 의무들이 개개인이 각자의 목적 실현을 위한 자유의 조건들로 역할을 하는 사회적 자유의 첫 번째 영역은 사적 관계(Personal Relationships)의 영역입니다.
호네트가 보기에, (i) 우정, (ii) (성적-sexual) 친밀성, 그리고 (iii) 가족으로 구성된 사적 관계의 영역은 우리가 서로를 참조하여 스스로를 달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자유의 분명한 형태입니다.
이 영역에서 우리는 서로가 상호 호혜적으로 각자의 목적과 의도에 관한 확증을 통해 온전히 자신이 되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자유를 달성합니다.
1. 우정은 역사적으로 지속해서 우리의 좋은 삶을 위한 제도적 배경이 되어왔습니다.
우정 관계들은 우리의 사회적 참여와 그 안에서 안락함을 허용했던 (서구 사회의) 펍, 카페, 살롱, 심포지엄 등의 상호 호혜성의 공간에서 발전해 왔던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친구나 동료를 참조하여 각자의 의도나 욕망, 그리고 감정들을 구성하고 확증합니다.
즉 친구나 동료가 허용하는, 우정의 사회적 제도들이 허용하는 상호성의 공간 속에서 나만의 의도나 욕망, 그리고 감정들을 탐험함으로써,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지가 더욱 분명해지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여기서 나는 동일한 자기 탐구를 위한 공간을 친구에게 제공하고 허용합니다
개인적 차이를 향한 '수용성(receptivity)'과 개방성(openess)'을 형성해 내면서, 우정 관계들은 이렇게 이질적인 개개인이 규범적 기대들의 다양한 형태들을 공개적으로 교환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친구나 동료와의 상호 호혜적이고 상호주관적인 사회화를 통해 우리는 자기실현의 다양한 가능성을 비로소 현실화해 낼 수 있는 것이지요.
2. (성적) 친밀성의 관계 역시 자기 탐구를 위한 유사한 공간을 제공해 줍니다.
우정 관계에서와는 달리, (성적) 친밀성의 관계는 우리에게 나의 신체와 신체적 욕망에 관한 자기 탐구를 가능케 합니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섬세한 몸짓, 얼굴 표정, 그리고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상대의 신체적 선호도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지를 인지하면서, "신체적으로 통합된 우리 (physically unified We)"가 됩니다 (Ibid., 148).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상대를 참조하여 신체적으로 완성되고 확장될 수 있고, 동일한 기재가 파트너에게도 작동하게 됩니다.
이 (성적) 친밀성의 관계에서 우리는 신체적 상처나 모멸감과 관련된 정서적 위협 없이 각자의 욕구를 신체적으로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Zurn, Axel Honneth, 172).
3. 가족은 윤리적 삶의 형태 속에서의 자녀의 사회화를 허용하고, 자녀를 통한 부모의 발전을 도모하면서 부모와 자녀 간의 연대성이 제도화된 영역입니다.
우정이나 (성적) 친밀성의 관계가 언제든 종결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가족은 그 지속성 면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습니다.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자녀의 성장 과정 동안, 즉 각 단계의 특정한 생물학적, 인격적 성숙의 시기 동안 고유한 가족의 역할과 기대 체계 속에서 서로에게 "일정 정도의 공감, 애정, 돌봄"을 제공하고, 반대로 서로에게 이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가족이라는 제도 속에서 부모와 자녀는 비계약적인 방식에서 서로를 참조하며, 자녀들은 기본적인 사회화와 성숙을 위해 스스로를 제한하고, 부모 역시 자녀의 성장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제한합니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삶의 고독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일종의 세속적 위로, 평안, 안락"을 제공해 줍니다 (Ibid., 173).
그리고 가족은 일생의 삶의 단계를 통해 "생물학적 삶의 리듬을 이해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없는 우리의 생물학적 원천"에 수긍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해 줍니다 (호네트, 자유의 권리, 164).
이처럼, 세 가지 분명한 특징을 가진 사적 관계들은 우리의 (자유로운) 행위가 제도화된 영역들로, 서로를 참조하며 상호 호혜적으로, 상호주관적으로 각자의 목적, 욕구 감정 등을 확인하며 실현하도록 하는 공간입니다.
즉 사적 관계들 속에서, 개인의 특수성이 사회의 보편성과 통합되면서, 우리는 상호 간 인정 속에서 서로 공유된 (혹은 얽혀있는) 현실을 인지하고 함께 형성하며, 우리의 행위를 타자의 목적을 충족하기 위한 조건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기존의 상호 작용 관계들을 관찰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닌, '도덕적 배려를 잊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의무의 당위성이 지배적이지 않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며 삶에서 실제적인 맥락들을 생성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호네트에게 사적 영역은 '자유의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회적 자유는 더 이상 'I'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닌, 'We'의 관점에서, 서로가 그동안 규범적으로 합의하고 이행해 온 행위들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호네트에게 이 사적 관계의 영역들은 "개인의 자기실현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사회 조건들"이며, 그런 점에서 이 영역들이 "개인의 내적 본성의 발전을 촉진"할 때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Zurn, Axel Honneth, 173).
이렇게 사적 영역을 자유의 '실재'인 사회적 영역 안에서 해석함으로써, 호네트는, 이 영역들의 규범적 재구성을 위해, '경험적 사실성 (empirical facticity)'과 '규범적 타당성(normative validity)'을 구분하면서, 사적 영역의 역사적, 사회 과학적 발전 과정을 추적해 갑니다.
이 과정은 호네트에게 특히나 중요한데, 이를 통해 그는 (i) 이 영역에서 우리가 특정한 역할과 규범을 조율하면서 유지하고 재생산해온 도덕적 문법을 발견할 수 있고, (ii) 이 영역 속에 내재한 도덕적 문법들이 역사적, 사회적 변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 온 과정을 통해 무엇이 진보적이었고 퇴행적이었는지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후자는 호네트에게 사회 비판 이론을 위한 직간접적인 토대를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공간의 제약으로, 제가 사적 영역에 관한 호네트의 규범적 재구성을 여기서 상세히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점만 간략히 소개하자면, (Zurn과 Pada를 참조하여) 사적 영역의 규범적 재구성에서 호네트가 식별해 낸 중요한 가장 진보적 변화는 이 영역의 '민주화 (Democratisation)'입니다.
이 사적 관계의 제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전에 여기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을 점차 우리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었습니다.
(i) 과거 귀족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사교 활동은 점차 중간 계급까지 확산되며 일반화되었고, (ii) 과거 남성 중심의 성적 선택권이나 우선권은 점차 여성들이 자신들의 신체적 안전을 위협받거나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 친밀성의 관계 발전 속에서 사라져 갔으며,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지만) 이성애 중심의 관계는 점차 성적 소수자들을 이 영역 안에 포섭시킴으로써 절대적 지위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iii) 가족 구조는 이미 인종, 민족, 계급을 너머 사회적으로 안정화되었습니다. 특히, 가족은 그 제도적 역할과 기대의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분화를 거듭해 왔는데요. 여성은 더 이상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아이를 낳는, 자녀를 돌보는 수동적인 개인으로 묘사되지 않으며, 양육이나 집안일에 있어서 보조적인 의무에 한정되었던 가부장적 모델은 이제 낡은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또한 자녀들 역시 이제 동등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으며 가족의 의사소통과 토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적 관계에서의 이 '민주화'는 이제 이 영역에서의 주요한 도덕적 문법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사적 관계들의 영역은 우리에게 "상호 간 자발적인, 그리고 수용적인 사회 파트너들과의 사회화를 통한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허용합니다 (Pada, Axel Honneth's Social Philosophy of Recognition, 168).
그리고 이 영역에서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차이'를 수용하는 방식을 학습하게 되고, 여기서 발생하는 모든 수용성은 사회적 유대 관계 속 규범적 기대에 따라 조정되고, 개정되며, 개인의 정체성 형성을 위한 '규범적 원천들의 잉여(a surplus of normative resources)'를 생산해 갑니다 (Ibid., 169).
여기서 '규범적 원천들의 잉여'라는 용어는 (다소 간 생소하면서도) 매우 중요한데요.
호네트는 사적 관계를 개인의 사회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 형성이 어느 정도까지 수용될 수 있는가 여부가 끊임없이 논의되는 장소로 여기면서, '규범적 원천들의 잉여'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즉 이 사회화 과정에서 나의 특수성이 보편성을 향해 규범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 나의 정체성 주장과 관련된 모든 규범적 원천들은 언제나 완전히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게 될 텐데요.
따라서 이 영역에서 개인의 자유 (혹은 자기실현이나 정체성 형성 과정)와 관련된 규범적 원천들은 언제나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형태로 소진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될 것이고, 이 '규범적 원천들의 잉여'는 사적 영역 속에 내재한 독특한 도덕적 문법으로써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규범적 잉여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사적 영역 내에서 새로운 관계나 기존 관습의 개정, 혹은 소멸을 목격해 왔고, 동일한 방식에서 앞으로도 이런 현상들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제 우리는 자유가 단순히 우리의 목적이나 욕망을 관찰하는 (혹은 주장하는) 것으로만 협소하게 해석되지 않고, 그 자체로 '우리의 목적을 실현하거나 구체화' 하는 과정을 식별하게 됩니다.
호네트에게, (그리고 저에게도) 우리의 좋은 삶을 위한 진정한 자유는 사회적 자유의 영역들 중 하나인 사적 관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내재된 '규범적 원천들의 잉여'와 함께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좀 더 정확하게 분석하고, 진단하며, 파악해 낼 수 있습니다.
사적 영역의 구성원들의 규범적 주장이 이 영역이 약속한, 혹은 합의한 내용과 얼마나 간극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우리는 사회적 자유가 우리에게 보증한 그 내용물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지요.
반대로, (보다 중요하게는) 우리는 사적 영역 안에 (혹은 사회적 자유 영역 안에) 이미 내재적으로 새겨진 규범적 약속이 이행되지 않거나 이행될 수 없는 방식들을 지적하면서 현실 비판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법적 영역이나 도덕적 영역에서) 자유를 단편적이고 표피적으로 해석하면서 발생하는 다양한 (한국의) 사회 문제나 병리적 현상들을 분석하는 것과는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사회 문제나 병리를 진단하는 것은 이 영역의 범주를 우리가 잘못 이해했을 때, 혹은 일면적으로 수용했을 때 발생하는 현상들을 분석하는 일이라면, 규범적 잉여를 통한 사회 비판은 사회적 자유의 영역이 우리에게 약속한 내용들을 실현하는데 실패한 것에 대한 (이 영역들 안에 함축되어 있는 이상들과 이 이상들의 실제 실현 간의 차이) 우리의 응답인 셈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저는 앞으로도 계속 글을 발행할 예정입니다. 유사한 주제로 이전에 발행한 글은 다음을 참조해 주세요: https://brunch.co.kr/@2h4jus/14, https://brunch.co.kr/@2h4jus/33
사회적 자유의 한 영역으로써 사적 관계의 규범적 재구성을 통해 그 안의 고유한 도덕적 문법을 식별해 내면서도, 호네트는 이 영역에서 발견되는 서로를 향한 의무들이 항상 "명백하고 투명한 내용물"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습니다 (호네트, 자유의 권리, 126).
호네트는 이 영역에서 지속해서 발생될 수 있는 잠재적인 사회 문제와 오개발(misdevelopment)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일과 여가 시간 사이의 점차 모호해지는 경계들," (특히 남성들에게) "이미 규범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평등의 원리를 이행하는 데 있어 어려움"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 (이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이대남으로 대표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직업적 성공 (혹은 경제적 부)를 향한 야망, 혹은 점차 증대되는 (노동 유연성으로 대표되는) "직업적 요구들"은 모두 사적 영역에서 우리의 관계들을 약화시키는 주요한 현상들입니다 (Ibid., 152-154).
특히나, 호네트가 보기에, "자본주의 시장 속에서 발견되는 확장과 자율화를 향한 경향성"은 서로의 애착을 위해 요구되는 성향들을 우리에게서 점차 빼앗아 가고 있는데요 (Ibid., 154).
호네트는 낭만적 관계 위에 확립된 사적 관계의 영역들이 더 이상 상호 인정의 특별한 경험으로 유지되지 않은 채,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점차 침식된다면, 사회적 자유 영역의 토대는 점차 약화될 것임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호네트는 이러한 사적 영역의 '식민화(colonisation)'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구성적인 방식에서, 사회적 자유의 경제적 영역에 있어 (시장 경제) 규범적 한계들을, 즉 시장에서의 경제적 행위를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 주장은 우리의 진정한 사회적 자유가 실현되는 또 다른 공간, '시장 경제'에 관한 규범적 재구성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다음 회차에서는 호네트의 시장 경제에 관한 규범적 재구성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