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우주가 멈춰버린 네글자, '키위아빠'
열대야가 지독했던 2024년의 어느 여름 아침. 출근 준비로 분주한 나를 아내가 다급히 불러 세웠다. 아내는 언니와 사주를 보고 왔는데, 내 이름을 바꿔야 일이 잘 풀린다는 말을 들었다며 봉투 하나를 슥 내밀었다. "이 무더위에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야?" 출근길의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며 마지못해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름 하나 바꾼다고 인생이 달라질까 싶어 열어본 봉투 안에는 정성스레 삼등분으로 접힌 A4 용지가 들어있었다. 귀찮은 마음으로 종이를 펼친 순간, 내 시야에는 낯선 네 글자가 박혔다.
'키 위 아 빠'
그 네 글자를 본 순간, 아침의 소음도, 후텁지근한 공기도, 흐르던 시간도 한꺼번에 정지했다. 8년 동안 그토록 듣고 싶었지만 감히 욕심내지 못했던 그 이름. 모든 우주가 잠시 숨을 참는 듯한 정적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아빠’라는 세계로 진입했음을 깨달았다. 아내는 눈치 백단인 나를 속이기 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던 것이다. 평소 이성적이라 자부하던 나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안 울 줄 알았는데, 8년 치의 기다림이 눈물이 되어 왈칵 쏟아졌다.
태명은 고민할 것도 없이 ‘키위’였다. 우리 부부에게 가장 행복한 기억을 선물했던 뉴질랜드 여행의 추억을 담은 이름이다. 대외적으로는 ‘키도 크고 위도 튼튼한 아이’라는 건강한 뜻을 내걸었지만,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정의는 ‘우리 집의 기쁨과 위로’였다.
그 기쁨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아내의 고향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임신 중인 산모를 케어하며 이사를 준비하는 것은 고도의 전략과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일주일 만에 운동도 없이 3kg이 빠질 만큼 고된 과정이었지만, ‘키위’라는 존재가 주는 감사함은 그 모든 피로를 상쇄했다. 집을 사는 것보다 파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던 부동산 시장의 파고 속에서도 우리는 오직 한 마음으로 시온이가 태어날 보금자리를 가꾸었다.
2024년 8월 24일, 처음으로 초음파를 마주했다. 4주 5일 차. 0.5mm도 안 되는 작은 생명이 그곳에 있었다. 난황이 불분명하다는 의사의 말에 덜컥 겁이 났지만, 간호사 선생님이 던진 “아버님, 이쪽으로 오세요”라는 한마디가 나를 깨웠다. ‘맞아, 나는 이제 아버님이야. 걱정은 내 역할이 아니야. 내 역할은 이 가정을 지키고 아내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아내의 식단과 건강을 책임지는 가장 성실한 보좌관이 되기로 각오했다.
10주 차에 들은 키위의 심장 소리는 마치 거대한 드럼 소리 같았다. 임신 중 아내는 입덧으로 토마토와 누룽지만 간신히 넘기며 버텼다. 남들보다 기간은 짧았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늘 애틋했다. 정밀 초음파를 통해 손가락 발가락 10개를 확인하던 순간의 떨림은 대학교 입학 발표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이사를 마친 후, 아내의 고향에서 보내는 임신 기간은 평화로웠다. 낡은 2층 집 창밖으로 보이는 낙엽과 아이들의 소음조차 아내에게는 태교가 되었다. 퇴근 후 뒤뚱거리는 아내의 손을 잡고 대공원 밤산책을 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태담을 나눴다. “키위야, 아빠 오늘 회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 너를 정말 사랑해.” 연애할 때는 막차 시간에 쫓겨 헤어져야 했던 우리가, 이제 같은 집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새삼 뭉클했다.
하지만 키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줏대 있는’ 아이였다. 끝까지 머리를 위로 둔 역아(易兒)의 자세를 고집했다. 아내는 고양이 자세 요가부터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우리는 역아회전술의 명의를 찾아 중앙대학교 병원까지 갔다. 의료진이 아내의 배 위에 올라가 온 힘을 다해 태아를 돌리려 압박하는, 산모와 아이 모두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과정이었다. 태아의 심박수가 요동치기도 한다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키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심장 소리마저 평소처럼 고요했다. 외부에서 누가 제아무리 돌리려 애써 눌러도 요지부동인 키위를 보며 우리는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여보, 우리 이 정도 했으면 됐어.” 최선을 다한 서로에게 박수를 보낼 뿐이었다.
결국 예정일보다 열흘 앞선 4월 15일로 수술 날짜가 잡혔다. 엄마와 생일이 같아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키위의 밀당이었을까? 산부인과 호랑이 선생님의 “안 해도 될 걱정 하지 말라”는 일갈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는 불안 대신 설렘을 선택했다. 조리원 브이로그를 100개쯤 보고 모든 리스트를 체크한 뒤에야 드디어 그날이 왔다.
2025년 4월 15일 오전 8시 16분. 2.76kg의 작은 공주가 우렁찬 울음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동영상을 찍는 내 손이 떨렸다. 천리 밖에서 봐도 내 딸이었다. 아내를 닮았으면서도 나의 DNA가 아주 강렬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얼굴. ‘장녀는 아빠를 닮으면 잘 산다’는 옛말을 떠올리며, 그 위로 같은 문장에 마음을 기댔다.
감염병 예방 수칙으로 분만실에서는 아이를 안아볼 수 없었다. 감질나는 기다림 끝에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하던 날, 드디어 시온이를 처음 내 팔에 올렸다. 그때의 당혹감을 잊을 수 없다. 시온이는 생각보다 훨씬, 깃털처럼 가벼웠다. 8년을 기다려온 존재의 무게치고는 너무나 가벼워서, 혹여나 이 작은 생명이 내 서툰 손길에 잘못되지는 않을까 겁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발그레한 볼따구와 앵두 같은 입술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긴장은 이내 녹아내리고 입가에는 바보 같은 미소만 번졌다.
신생아실 유리창 너머로 시온이를 만날 때마다 아이가 나를 알아보는 것만 같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면회 시간이 끝나 블라인드가 내려진 복도를 한참이나 서성였다. 늦은 밤, 아내를 겨우 재우고 다시 그 복도를 찾아가 속으로 자장가를 불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 품에는 자기 싫다고 펑펑 울다 잠든 네가 있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자는 너를 보며 나는 다시금 고요한 자장가를 부른다. 이 고요한 자장가를 아빠는 아주 오래오래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