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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Oct 31. 2020

큰 파도에 물러서지 않는 법

나의 사랑하는, 무너지는 세계



 태풍이 지나갔다. 


 부산에 살면서 이렇게나 공포스러운 밤은 처음이었다고, 아직도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로 오싹한 기억. 겨우 잠잠해진 새벽에 나는 못이룬 잠을 청하는 대신 바다로 향했다. 마이삭이 생채기를 남긴 도시 곳곳을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싶은 약간의 주저함도 물리치고서. 새벽 다섯 시. 송정 바닷가엔 4미터가 넘는 파도가 인다. 


마주한 거대한 파랑은 어젯밤 두려움의 꼴을 하고 있다.


 서핑을 시작하고나서 가장 무섭고 힘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파도다. 초보시절 바다에 대해 갖고 있던 맹목적이고 순진한 열망은 파도타기를 실패하며 경험하는 갖가지 불쾌한 기억으로 인해 점차 두려움으로 바뀌어 간다. 멋모르고 실력보다 크고 센 파도 타기에 도전했다가 떨어지면서 대부분 누적되는 기억이다. 파도가 부서지는 지점에 대개 휘말리면서 수면 위와 아래를 구분 못할 정도로 구르면서 정신을 못차리다가 겨우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더니 같은 자리에서 다음 파도에 또 맞고 이를 반복한다. 이때 생긴 아찔하고 진한 경험 때문에 서핑을 관두는 사람도 생긴다. 그러니 두려움이 오늘의 파도보다 커질 때, 파도를 타기보다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막 초보딱지를 떼고 한동안은 한 번도 제대로 파도를 못 탄 날이 많았다. 그런 날은 분했다.


 내가 다시 마음을 부여잡고 파도를 극복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건 오로지 저 순도 높은 분노 덕분이다. 비슷한 시기에 서핑을 시작한 친구들보다 내가 뒤쳐지고 있다는 약은 감정까지 치밀어 올라서 말이다. 혼자 평일에 틈틈이 시간을 내서 나는 작은 파도부터 극복해보기로 했다. 이정도면 파도에 말려도 괜찮다거나, 파도를 컨트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심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바다에만 들었다. 그런 수많은 시도들이 쌓이면서 공포감이 점점 물러가고, 서핑을 좋아하는 마음이 다시 들어서기 시작했다. 내게 바다는 다시 바다였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크기는 달라서 이토록 애먼 노력이 필요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누군가에게는 나처럼 좋아하는 것을 성취하고픈 마음보다 큰 장애물들이 때때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나는 나름의 단계를 시도하면서 이제는 큰 파도에 도전하지 못해서 느끼는 좌절감보다 어떻게든 바다에 뛰어들 수 있다는 환희를 더 크게 느낄 줄 알게 됐다. 이 글이 부디 비슷한 이유로 서핑을 망설였던 나같은 사람에게 닿아서, 장벽 너머에 있는 갚진 마음들을 놓치지 말기를 바란다.


 해변을 두드리는 거대한 파도를 본다. 내 두려움의 꼴이 매 초마다 진 자리에 환하고 하얗게 오늘의 아침이 부서진다. 고작 일 미터의 파도에도 벌벌 떨기만 할 줄 아는 나는 저만한 크기의 환희를 알지 못한다. 다만 아직은 도망가지 않고 마주하며 그 기쁨을 상상하고 가늠하는 것이 최선이다. 점점 잦아드는 파도를 멀리서 한 서퍼가 바라보고 있다. 그는 뛰어들 수 있는 눈빛을 가졌다. 


 오늘은 슬프지 않다.

 아마 내일도, 모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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