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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 Oct 31. 2020

이제 당신은 어디로 가나요

나의 사랑하는, 무너지는 세계


 -사진집을 찾았다


 이게 여기에 있었네. 참, 오랜만이다. 이게 뭐냐면 세상에 단 두 권뿐인 제목 없는 사진집이다. 사진을 좋아하는 연인끼리 한 번씩 해보는 놀이라고 해야 할까, 온통 산이며 바다며 나무사진 뿐이지만. 처음 완성된 사진집을 받았을 때 아무것도 없이 하얗기만 한 커버가 되레 단단해 보여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 이걸 만들자고 먼저 제안했던 게 누구였더라. 나였던가, 당신이었던가.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둘 다 사진을 무척 좋아해서 쉬는 날이면 카메라를 들고 참 온갖 것들을 찾아다녔더랬다. 봄엔 매화와 산수유꽃, 벚꽃을 보러 광양, 구례, 하동에 가고 여름엔 부산에서 출발해 7번 국도를 타고 곧장 울산, 포항, 영덕, 울진을 지나 강릉과 양양까지 다녀왔다. 안반데기에서 당신과 함께 보았던 밤하늘은 어찌나 진하고 달던지, 산을 오른 만큼 좀 더 가까워진 은하수 사이로 별빛이 뚝뚝 떨어지곤 했다. 아니 좀 더 가까워진 건 우리였을지도. 


  관광객들로 웅성거리지 않는 8월 말 제주도 정말 좋았다. 둘 다 서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근처 서프숍에서 빌린 서프보드로 곽지해변에서 깔깔거리며 탄 일이 있다. 파도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제주 바다에 풍덩 뛰어든다는 기쁨 하나로 악착같이 파도를 잡고 넘어지고 뒹굴던 날, 바다는 어찌나 맑고 눈부시던지 그 물낯에 닿는 것들 모두 아름다운 것이 되어 기억으로 쌓이던 날이었다. 추억은 철썩철썩 몰려오기보다는 차곡차곡 좋은 순간들이 모여 쌓이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는 걸 생각했다. 때마침 수중 필름카메라를 챙겨간 나는 그날 내가 본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위해 셔터를 눌렀었다. 그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사진에 담긴 당신의 표정을 보니 나는 분명히 알겠다.


 사진집은 겨울의 경주에서 두 번 마침표를 찍는다. 내가 한 번, 당신이 한 번. 연인이 되고 처음으로 떠난 여행지가 경주였는데 마침 나의 이야기도, 당신의 이야기도 우리가 경주 여행길에서 만난 고양이라던가 함께 마셨던 커피 사진으로 시작해서 감포에서 보았던 일출 사진으로 맺는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의 해장국이 무척 맛있어서 매년 함께 오자는 이야기를 나눈 일도, 그날 마셨던 커피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취향에 맞았는가를 서로가 표현하고 나눌 수 있음에 기뻐했던 일도,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짓던 우리의 표정이 해를 거듭해도 여전히 윤택할 것이라는 안도감까지 그 사진 속에 몽땅 들어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진집 어디에도 우리가 함께 담긴 장면은 하나도 없는데 나는 내가 담은 장면들 속에서 온통 당신과 나를 보고 당신이 담은 장면들 속에서 나와 당신을 본다.


 말없이 별을 보고 바다를 보고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그 장면들을 4:3 비율의 사각형 안에 담을 것이라는 핑계로 우리는 어쩌면 발끝과 걸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크게 썼는지도 모른다. 총 174페이지. 고스란히 담긴 몇 년. 같은 곳을 보던 마음. 책장을 닫으며 그제야 나는 사진집의 메시지를 마주한다. 에워싼 풍경과 함께 마주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윤기가 나고 흐를 만큼, 우리는 꽤 좋았다. 그리고 나는 이 사진집을 이제 버리려고 한다.



-여행자 G에게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우리  년간 나눈그리고 함께한 여행이  안에 여전히 있습니다내가 당신을 잃고 당신도 나를 잃었다는  깨달았을  그래도 우린 제법 어른스러웠어요그러나 자국은 시간에도 남네요마음에도 남고요한동안 박박 문지르고 달래보겠지만 쉽사리 지우기 어려울 거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요철들을 하나씩 다듬으며 앞으로 무조건 나아가야 한다는 인생은 돌아가는 비행편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알아요이제 당신은 어디로 가나요라는 물음은 마음이 아파서 차마 전하지 못했군요. 나는   여행을 이제야 마치려고 합니다날이 좋아 다행입니다순항이기를안녕안녕만나서 반가웠어요어차피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행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너무 오래 그곳에 머물지는 말아요사랑도 당신도 영영 가겠지만  지내란 안부 정도 묻고자 하는 우리의 우정은 아직 마음  편에 남아있으니까아직 뜨겁고요기약 없이  보자는 인사는 한땐 진심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지내주어요.

오래  방을 묵다가 떠난 마음에게굿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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