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와이파이 기사 / 박다안
갈피를 잃은 책임자는 책망할 대상을 찾는다. 냉소하는 다수의 학생들은 쉬운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정치의 능동적 참여를 촉구하는 이들에게 현상에 대한 비판보다 현상 너머의 설득이 중요하지만, 정치 교육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들에게 정치인의 역량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우고등학교 재학생과 교사들에게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다. 학생 주도적인 학생 자치 이해도가 매우 높은 학교라는 점이다. 여기서 ‘매우 높음’의 기준은 절대적이며, 상대적이기도 하다. 학급 단위의 자치를 위해 매주 월요일 2교시를 고정적으로 학생들에게 내어주는 학교, 자발적으로 학생의 문화와 수업을 늦은 밤까지 논의하는 학교는 전국적으로도 드물다. 논의와 참여자들의 수준 또한 탁월하다.
그중에서도 다른 어떤 요소보다 인상적인 점은 학생 자치 주도자들의 진정성이다. 나는 단언컨대 이우고 자치 고관여층 주도자들의 진정성은 다른 어떤 일반고에서도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이우고에서의 생활을 어려워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전달하며 눈물을 흘리던 선배, 더 좋은 대의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던 친구를 기억한다. 그들의 진심은 감히 제도를 모방하는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그들이 느꼈던 학생 자치의 절망과 소명감은 그들을 또다시 출마로 이끌었다.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이미지라 했나. 나와 이우고의 많은 학생들은 출마자들이 가진 책임의식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그만으로도 출마자들의 진심을 느끼고, 한 표를 행사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문제는 그 이후 자치 주도자들의 역할이다. 자치 주도자들의 열의와 진정성이 항상 실제 자치에서의 역량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개성이 정책과 조직활동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자치 주도자들의 역할은 ‘이미지 전시’에서 그친다.
내가 입학한 2019년 이래 학년회/학생회 출마자들의 기록을 살펴보자. 상징적 언어를 제외하면 지향과 공약은 비슷하다. 다른 자치조직/삼주체와의 협력, 신학년 적응과 맞이, ‘대나무숲’과 ‘대자보’ 문화 활성화, 관계 증진 활동 개설 등이 주요 공약으로 배치된다. 홍보 플랫폼 개편, 조직 내부 구조 개편은 매년 논의되나 조직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주제다. 이 의제들은 학생의 주체적 요구라기보다 학교를 위한 업무에 가까우며, 논쟁성과 토론 가능한 이견 제안이 어렵다는 공통점이 있다.
매년 학생회/학년회가 설정한 의제를 보면, 이우 내 조직의 기본적 업무를 더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있어 과하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것이 지역 정치인의 “우리 동네 예산 많이 가져오겠습니다”와 무엇이 다른가? 열의와 진정성을 품고 출마하는 후보들의 의제와 가치관이라기에는 그 괴리가 꽤 크다. 공청회에서만 설명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학기 내내 학생 자치 조직의 방향은 최초 자치 고관여층들의 신념과 떨어진 채 이끌어진다. 왜 이런 고질적 문제가 이어지는가?
논쟁적 소견을 밝히자면, 나는 이우고의 자치 고관여층, 자치 대표자 학생들이 그에 속하지 않는 다수 학생들의 자치 참여 배제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자치 주도층은 의도치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그들의 자치는 다수 학생들의 자치 냉소, 무관심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다수’는 재학생 중 약 60%의 학생들을 말한다. 실로 ‘40대 60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왜 60%인가? 이는 지난 6월 실시한 ‘팀 퍼블릭 도메인’의 <이우고 학생자치 의식 설문조사>에서 해석된 결괏값이다. 전교생 중 학생자치 임원(학생회/학년회) 경험 0회, 비상설위원회 경험 0~1회, “다른 사람과 교내 자치에 관해 이야기한 경험”에 부정 응답을 남긴 집단의 비율이다. 해당 집단은 설문 결과 53%~60%에 형성되어 있으나, 미응답자를 고려하면 최대 75%까지 늘어날 수 있다. 60%는 절반 이상의 학생 ‘다수’를 상징하는 숫자다.
이들이 학생 자치에 미치는 영향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항목은 ‘자치 지위’다. 이른바 위 세 영역에서의 ‘60%’는 ‘자치 지위가 낮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는 비율이 평균보다 현저히 높다. 특히 학생회/학년회 경험에 따른 지위 평가 차이는 낮음 비율이 각각 57.1%와 18.2%로 약 40%의 격차를 보인다. 같은 조사에서 자치 경험과 무관히 “최근 총학생회/학년회가 다루는 의제를 이해하고 있다”는 설문에 70% 가까이 ‘그런 편’이라는 응답을 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문제의 실체는 뚜렷하다. 그렇다면 자치 고관여층, 주도층의 어떠한 문화가 이러한 현상을 만들었을까?
만약 당신이 이우고 학생 자치를 적극적으로 참여해본 경험이 있다면, 내부에서 어떤 고민을 가장 자주 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아무도 참여하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고민이다. 자치 주도층의 대부분은 기획 과정에서 ‘대표자들의 적극적 기획과 그에 대한 다수 학생들의 적극적 응답’이 기획의 이상적 성공이라는 모델을 떠올린다. 이 시각에서 두 가지 문제점이 자치 고관여층, 주도층의 눈을 가린다. 하나는 자신의 자치 활동에 대한 객관성 결여의 문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열일하는 우리’와 ‘수혜를 받는 나머지’라는 양분된 인식이다.
전자의 문제, 자신의 자치 활동에 대한 객관성 결여는 보다 단순한 심리다. 대표자들은 자치의 숱한 실패와 절망에도 한켠에는 낙관을 품고 있다. 다시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준비하면서 자신이 배운 점을 학생 다수의 평가에 반영했고, 준비하면서의 애정/피로가 어떤 식으로든 보상될 것이라 생각하는 심리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대표자로서 자신의 활동을 바라보는 평가는 자기애가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소개한 대표자들의 불만은 자기애가 강하게 섞인 예상과 현실의 괴리를 느꼈던 경험에서부터 시작된다.
양분된 인식의 후자는 오래된 문제점이다. 심지어 2017년의 와이파이 기사 (https://brunch.co.kr/@2woowhypi/15)에도 ‘고민하는 애들만 고민한다’는 비슷한 문제제기가 실려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회의적이다.
첫째, 오늘날 ‘하는 애들만 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의원 경험이 없는 이들 중 63%가량은 1번 이상, 39%가량은 최소 2번 이상의 비상설위원회(O준위)에 참여한다. 이들은 여타 인식 조사에서도 임원 경험자들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둘째로, 이러한 양분된 인식은 일리 있을지언정 더 많은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대표층의 인원이 줄어들고 결집해 양분된 인식을 공유하며 자치 주도층들은 공통된 가치를 공유한다. “우리는 잘했지만 학생들이 소극적이었다.”로 대표되는 '60% 학생 비판'이다. ‘60% 비판’은 현상에 초점을 맞춘다. 정작 다수 학생들이 참여하지 않는 현상 너머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참여 적은 설문, 수요 없는 홍보 플랫폼, 결식과 외부 음식 문제, 즉 현상만을 보고 자치 고관여층, 주도층은 ‘60%’를 비판한다. 실제 다수 학생들의 개별 인식이 공론으로 형성되는 일이 극히 드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항상 참여 저조의 원인을 ‘60%의 무책임함’으로 짚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불만이 있으면 직접 전달하라”는 말은 원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불만이 없어서 전달이 되지 않겠는가? 자신이 가진 의식을 정치로 쟁점화시키는 능력을 모두가 가진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자기 고백에 서툴다. 누군가는 남들과 토론하고 그를 설득시키는 역량과 여력이 부족하다. 누군가는 다른 학생과 교사에게 불만을 직접 전달하기 어려워한다. 모두가 정치인이 될 수는 없기에, 자치 고관여층, 주도층은 이러한 현상 너머의 원인을 살필 책임이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팽배해있는 불만이 왜 공적 담론으로 형성되지 못하는지 다층적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간담회, 모임 등의 공적 논의에서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지, 고민하기 어려운지, 혹은 의견이 있음에도 망설여지는 지점이 어디인지 질문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60%’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것이다. 자치의 주체이고, 자치 조직 활동의 참여를 유도해야 할 직접 당사자들과의 평등한 대화가 필요하다.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개개인이 가진 사소한 문제의식을 읽어내야 한다. 개별 학생들의 의식을 모아 공론의 장으로 이끌어 내, 자치의 성과를 얻는 과정이 익숙한 일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느리고 고된 과정이지만, 피상적 설문, 파편화된 익명 게시판, 대나무숲에서 비롯된 ‘맥락 없는 발화’와는 다른 차원의 소통이다.
자치 고관여층, 주도층이 형성되는 구조적 차원의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여타 문제를 차치하고 단 하나의 문제를 짚어보자면, 정치 교육의 부재를 들 수 있다. 이우고는 학생 자치에 투자하는 자원에 비해 자치 주도층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자치 교육, 정치 교육이 부실하다. 학생들의 대표자로서 어떤 문제를 중시할 것이고, 어떤 가치에 의거해 판단할 것인지 이론적 바탕이 부실하다. 정치적 과정에 대한 이해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 자치 주도층은 주도자 몇몇의 개인 능력에 의존하거나, 익숙한 과거 사례를 답습하게 된다. 정치 교육의 부재가 정치적 철학의 부재로 이어져왔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치 주도층이 출마자로 나서는 준비과정에서부터 확실한 가치 토론이 있어야 한다. 허나, 기말고사가 출마 준비 시기와 겹친다. 지난해 ‘건방정’의 설문조사에서 ‘본인이 총학생회장단에 출마하지 않는 이유’ 1위는 ‘학업, 진로탐색 등으로 현재의 삶이 바빠서’(57.8%, 복수응답)였다. 부담을 감수한 채 시행되는 자치에 좋은 역할을 기대하긴 어렵다. 학생들에게 자치는 ‘더 좋은 논의’보다, ‘덜 미안한 짐’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4월 말~5월 초쯤 진행되는 임원 수련회가 또 하나의 기회다. 자치 조직의 1년을 기획하는 시간에 정치 교육이 포함되면 좋을 것이다. 조직의 확고한 결의를 다지는 데 있어, 구체적 가치를 더할 수 있다. 현재 매년 시행되고 있는 토의의 기술과 태도를 배우는 교육보다는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치를 월요일 1블록 수업을 메우는 ‘땜빵’에서, 학생들의 더 나은 학교 생활을 위한 실체적 논의로 변화시킬 수 있다. 이제는 임원 수련회 교육도 정치철학 교육이 필요하다.
이우고 학생 자치에 관한 첫 기억은 2019년 총학생회장 선거 공청회였다. 재학생이지만 투표권은 없고 공청회에는 참여해야 하는 이 기묘한 시간 속, 내 기억에는 출마자들의 메시지가 남았다. 학교와 일부 학생 간 갈등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 복수의 학생들이 말하는 ‘학교 가치와 개인 일상의 괴리’를 언급한 후, 총학의 주안점을 소개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학교의 이상이 뒤틀렸음을 지적하는 저항의 메시지이자, 문제제기를 주체적으로, 정치의 과정으로 해석하겠다는 선언이다. 당시 발언을 인용해본다.
“자치체계를 재가동시켜 내 삶의 불편함을 발화하는 것, 공적인 언어로 확장해 함께 발화하는 것이 두려움 없이 뜨겁게 타오를 수 있도록 총학은 개인들이 지핀 불씨들을 이어받아 실질적 진보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2019년 불씨 총학 이육샛별, 이한재)
현재 이우의 학생 자치의 방향은 당시 총학의 언어와 이미지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왜’와 ‘어떻게’, 철학과 방법이 명확하지 않은 자치는 공허하다. ‘잘하겠다’는 선의만으로 자치는 완결되지 않는다. ‘현상 너머의 원인’을 읽어내야 하는 것처럼, ‘언어 너머의 자치’가 무엇인지 소명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직 언어와 자치 실체의 차이는 꽤나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