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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파이 Jul 10. 2023

난감한 이우고 학생자치

2023년 학생자치에 관한 기사 / 김가진

나는 이우학교를 사랑한다. 1984 오마주는 아니다. (김가진 사진첩)

 기사에 들어가기 앞서 밝힙니다. 이 기사는 김가진의 개인적 견해일 뿐 와이파이의 공식적 입장과 일체 관련이 없으며 비판적으로 보시길 권합니다.


 학생들의 비정치화와 자치 주도층의 무맥락적 발화. 양단에 선 입장들에서만 원인을 찾으려고 해선 안된다. 자치 참여층은 단순히 피동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기에 참여층과 주도층은 상호의존적 관계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현 이우학교의 자치 문제의 원인은 복합적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라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치기구에 비해 수동적이고 합리적인 개인으로 전락한 학생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학생들을 변화시킬 총학의 시스템 개혁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2021. 고1 학년회장 선거 공청회가 진행 중이다. 투표율 90% 이상을 기록했지만, 의미 없다. (김가진 사진첩)

 이우고 자치는 난점이 많다. 그것이 ‘자치 주도층’의 문제인지, ‘참여층’의 문제인지는 유구한 논쟁거리다. 또 이 두 논지는 만나 서로 얽히게 되는데 자치 소극화(‘비정치화’라고도 한다.) 문제에서 ‘자치 주도층이 소극적인 참여층에게 원인을 떠넘긴다’는 주장과 ‘참여층이 주도층의 진행을 쓸데없음으로 간주하고 일방적으로 책임을 부과한다’는 주장으로 엇갈린다. 순환적 비판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6년간 자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온전히 한쪽의 잘못인 경우는 없었다. 무총학의 심각성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치 주도층은 학생들을 이해시키지 못했다는 입장이 뒤섞여있다. 이런 난해성에 의해, 드러나는 문제의 원인이 반드시 한 집단에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는 문제의 원인을 찾을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이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인지하고 있는 사실로 보인다. 6월 10일 진행한 ‘이우고 학생자치 의식 설문조사’에서 [이우고 자치의 문제는 복합적이다 (모두에게 있거나, 모두에게 없다)]라는 선지의 응답이 68%에 육박했으며, 이는 참여자의 자치 참여 횟수와 무관했다. (설문조사 응답률: 이우고 전체 학생의 약 41%)

설문조사 결과와 필자가 특정한 집단을 기반으로 한 벤다이어그램. (김가진 그림판)

 ‘자치의 문제점’을 해석하는 관점도 여러 가지다. 설문 조사 지표를 좀 더 공격적이고 간단한 표현으로 정리하자면 학교엔 크게 세 가지 부류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첫째, 참여하는 부류 [A].

둘째, 참여하지 않는 쪽의 문제로 생각하는 부류 [B]{※ A, C와의 교집합은 0이 아니라고 가정}

셋째, 참여하지 않는 부류 [C]{※ A의 여집합이 C라고 가정}

넷째, 주도하는 쪽의 문제로 생각하는 부류 [D]. {※ A, C와의 교집합은 0이 아니라고 가정}

마지막, 둘 다의 문제로 생각하는 부류 [E].

 일반적으로 A∩B는 본인들을 희생하여 C에게 수혜를 나눠준다고 보고 C는 A에게서 받는 수혜들을 무시한다(혹은 침묵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류들을 통계로 살펴보자면,

[A]는 약 88%,

[B]는 약 18%,

[A∩B]는 약 14%,

[C]는 약 12%,

[D]는 약 14%,

[E]는 약 68%,

[C∩D]는 약 2% 존재했다. 이처럼 C와 [이우고 자치의 문제는 실용적이지 않고 공감할 수 없는 의제이다 (자치 주도층에게 있다)]는 주장의 교집합[C∩D]은 약 2%에 불과했으며 후자의 주장(주도층의 문제이다)을 긍정한 집단의 평균 자치 경험 횟수가 참여층의 문제라는 집단에 비해 0.5회 높기도 했다.(다만, 참여도의 문제라는 쪽에 긍정한 집단에 높은 비율로 고1 집단이 섞여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 설득력 있는 근거가 아닐 수 있다) 따라서 현재 한쪽에서 책임을 찾는(약 30%) 행동은 일부분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로 보이며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당시 공청회 중 벌어졌던 공약에 대한 갑론을박 중 일부. 당시 총학 후보는 파격적인 입시 관련 공약으로 파란을 일으켰고 위 사진은 공약에 반대하는 분의 주장이다. (김가진 사진첩)

 22년. 무총학 사태가 일어난 후 학생들은 아주 고약하게 자치의 필요성을 체감했다. 이는 무총학이라는 단어가 보여주는 인상 때문이었는데, 무총학이 완전한 무자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 ‘이 정도면 자치가 없어도 되겠다’라는 여론이 팽배했다.

 실상은 달랐다. 총학의 부재에도 자치가 순환 가능했던 이유는 과거 총학의 수족이자 산하 혹은 협력 위원회들이 주축 없이도 활동을 이어나갔기 때문이었다.. 만 이는 몽유병처럼 그간 해왔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뿐이었으며 선생님의 도움이 수반됐기에 '단기적인 총학의 부재 상태'에서는 문제가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공간위와 학년회, 학년회와 중학교 등 학교 내의 단체들이 소통에 난항을 겪고 몇몇 위원회가 총학의 일을 겸행하며 문제가 점점 심화됐던 바. 장기적인 총학의 부재는 필연적으로 큰 혼란을 초래했을 것이다.


 한편, 14%가 주장하는 ‘무맥락적인 주도층의 발화 의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도층이 문제라고 보는 시각은 ‘복합적인 문제’에서 한 영역을 무게감 있게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이 자치기구에서 던지는 문제를 이렇게 인식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현재 이우고 자치는 대부분 주도층이 참여층에게 매달리는 구조이다. 어째서 이런 구조가 형성되었는가를 추론해 보면 앞서 얘기했던 학생들의 자치 필요성 인식 불가능을 꼽을 수 있다. 자치는 학생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데 학생은 자치가 없어도 존재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자연히 본인들의 프로젝트 성사 여부 불확실 위기에 내몰린 자치기구들은 급박해질 수밖에 없고 발화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혹은, 짧은 진행 기간이 주어지기에 급박해질 수밖에 없다. 교육문화위원회(일명 교문위)가 진행하는 수업간담회처럼 1년을 내다보며 천천히, 안정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학생들에게 녹아들 수 있는 프로젝트는 많지 않다. 짧은 기간에 많은 공지사항/내용을 욱여넣고 학생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참극이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마찬가지로 이런 상황 또한 온전히 자치기구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자치기구가 불성실했기 때문인가? 혹은 진실로 학생 전원이 공감하기 어려운 주제였는가? 그렇지 않다. 방학, 시험 기간, 학생/자치기구의 섣부른 일반화 등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과거 일어났던 다양한 문제 상황들이 침적되어 서로에 대한 편견을 심어낸 것이다. 어떻게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가? 선순환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한 번의 순환이 선행돼야 한다. 다만, 이미 자치기구는 준비되어 있기에 남은 요소인 ‘학생들의 참여를 증진시키는 것’만이 과제로 주어져 있다.

밴드 버스킹처럼 참여하면 좋으련만... 자치도 이우학교의 참여문화라고 여길 필요가 있다. (김가진 사진첩)

 분명 자치기구가 학생을 임의적으로 조작하는 데엔 한계가 있다. 학생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것은 굴에서 토끼를 꺼내는 것과 비슷한데, 회유하거나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토끼가 제 발로 굴 밖을 나서는 경우는 그들의 생존 그리고 이익과 직결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입시 문제이거나... 급식 문제이거나... 즉 본인들에게 직접적인 손해와 이익으로 다가올 때에야 격정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학생들의 수지 타산적 태도에서 기인한 문제로 보인다만 그런 태도는 자의적일 수도 있고 타의에 의해서 일수도 있다..? 비정치화엔 두 가지 수지 타산적 태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첫째로, 자의적인 미참여이다. 실제로 미참여는 좋은 결과를 보장한다. 예를 들자면, C나 D는 학교에게 개선을 주장하지 않았지만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중학생보다 운동장을 하루 더 많이 사용하는’, ‘매 학기 개선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임의 독서실을 사용할 수 있는’ 등의 혜택을 향유할 수 있고, 역설적으로 개선을 주장하지 않았기에 책임에서도 자유롭다. 이는 흔히 말하는 ‘합리적인 선택’이다만 합리적인 결과가 현명함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기적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합리적인 개인은 언제든 이기적인 개인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이다. '집단행동' 안에서 말이다.


 〈집단행동의 논리〉의 저자 맨슈어 올슨은 이런 행동을 ‘무임승차’라고 불렀다. 공동체에 속한 일부 부분집합의 주도로 일어나는 이익이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가게 된다면 합리적인 개인은 반드시 비용(위험)은 줄이고 이익(수혜)은 증대하려 시도하게 된다. 이는 무임승차로 이어지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책임감 하락을 초래하며, 주도층의 열정 과다 혹은 실패로 귀결된다. 조금 극단적이지만 올슨은 집단행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구성원에게 수혜를 약속하고 참여하지 않은 구성원들을 처벌하는 선택적 유인이 존재한다면 공동체는 집단이익을 증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이라 보았다. 참여하지 않았을 때에 비용을 만들어 둘의 위험을 같게 만들어내려 한 것이다.


 물론 모든 참여자가 합리적인 개인은 아니다. 따라서,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침묵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위한 침묵도 존재한다. 두 번째가 이런 경우이다. 침묵의 나선 이론이 그 예인데, 다수 의견엔 쉽게 동조할 수 있지만 소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 없는 이유가 남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것에 있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 침묵할수록 소수의 의견은 더욱 작아지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그 규모가 작아지며 가끔은 다수의 쪽으로 침묵이 전염되기도 한다. 이런 작용이 곡선을 그리며 더 작은 점으로 응집되는 것이 침묵의 나선이다.


간단히 그려본 침묵의 나선이론. t는 시간이다. (김가진 그림판)

 참여층은 이러한 도탄에 들었다. 특히 선악의 구분이 명확한 이곳에서, 명백히 ‘비도덕’에 속하는 이야기를 꺼내기란 참 거북하다. 또, 적극적이고 짙은 견해를 가진 여론을 혼자 상대해야만 하기에 만약 그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면 침묵할 뿐이다. 결국 침묵상태에서의 주류 의견이 여론으로 형성된다. 과거서부터 제시된 ‘발화의 장’, ‘참여층의 이야기를 듣기’ 식의 문제해결 방법은 자치 주도층이 이를 본능적으로 인식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발화의 장’을 통해서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합리적인 개인의 면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듣기만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이우학교 자치 불(미)참여는 이 두 가지의 매커니즘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즉 ‘현재 이우학교에서 합리적 개인은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으며, 소수의 의견에 동조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만연하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식은 단 한 가지이다. ‘참여할 필요가 없는 동시에 참여할 수 없는 자치’. 하지만 이에 대한 방안으로 올슨이 주장한 것처럼 참여하지 않은 이를 처벌하기란 가혹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우리의 문제는 겨우 학생자치에 국한된 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다른 해결방법이 더 호혜적인 조치로 보인다. 바로 ‘사회자본 이론의 해결방법’이다. 공동의 목표나 가치관을 공유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상호 신뢰 가능하도록 만들어 협력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이우의 자치 교육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현재 추구하는 이우 가치와도 맞닿아있는 모습이다. (이우학교가 추구하는 이우 가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클릭)

 돌아가, 사회자본이론에 입각하면, 들어가는 학습비용&학습시간은 필수적이다. 사회자본의 형성은 절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어, 장기적이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은 많은 기업들이나 단체에서 비효율적인 면으로 부각됐지만 학습비용과 학습시간이 보장된 이우학교에는 더없이 좋은 방식이다.

 따라서 이제는 학생들의 문제의식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해결하는 것보다 학생들에게 자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학생 비정치화의 본질적인 원인은 손익을 계산하려는 합리적 행동과 비난을 피하려는 두려움이 공존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치에 대한 인식을 바꿈과 동시에 바뀜을 체감하게 만들어 자치에 대한 학생참여의 문화를 성숙시켜야 하며,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자치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자치교육을 강화해야 할 대상은 학생뿐만이 아닌데, 임원수련회 등 현재 이우학교의 자치교육은 상설기구. 즉 학생자치 임원에게 국한돼 있다. 다시 말해, 공간위나 교문위 등의 비상설기구(자치기구)에선 체계적인 자치교육을 받을 기회가 한정돼 있다. 게다가 설문조사 응답 결과 [학생자치 임원 경험 있음]이 약 41%, [비상설기구, 자치기구 경험 있음]이 약 65%로 상설기구보다 비상설기구로 자치를 접하는 학생들이 한층 많기에 학년자치 시간을 제외한 임원수련회 등의 부가적인 자치교육이 비상설기구에서도 충분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학교에서 시행되는 자치교육과는 다르게, 총학생회 등의 상설기구에서 담당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라 생각한다. 학교와 학생 간의 이념 사이엔 거리가 있기 때문이며 총학생회만큼 전 학교를 아우르는 영향력을 지닌 기구가 없기 때문이다.

 학교가 나서지 못하고 학생들의 침묵이 이어지는 이때, 알맞은 자치기구의 부재까지 겹쳤다. 이젠 총학생회가 나설 수밖에 없다. (교육문화위원회가 ‘자치교육’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기에..) 총학이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 학생참여의 문화를 성숙시키는 것이다.


 다만 사회자본 이론의 맹점에도 주의해야 하는데, 사회자본 이론은 언젠가 집단 내 개인들의 행동이나 선택을 제한할 수도 있다. 공동규범에의 순응은 집단에서 개인의 자발성을 억제하고 개인적 자유의 제한을 초래하는 한편, 집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강제력을 정당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학에서는 전체주의적 학생자치를 방지하기 위해 산하 자치기구를 창설해야 한다고 본다. 이는 행정연구원이나 통계청과 비슷한 역할을 하며 한편으로는 자치기구마다 특성을 고려하여 추구해야 할 가치를 정립하는 식으로 운영하여 자치에 대한 깊은 논의를 전문적으로 하는 기구가 되어야 한다. 또한, 매달 학생자치 의식 설문조사를 진행하여 상황을 빠르게 진단하고 분석하며 변화해나가야 한다. 총학의 실무에 대해 꾸준히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개인에게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손해가 가지 않는 한 학생은 침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비난을 겪는 상황은 차치해 두자). 총학이 비판을 듣고 싶더라도 비판이 정식 절차를 밟아서 전달되기보단 풍문으로 듣는 것이 다반사다. 이에 학생에게 소수의 의견에 동조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문제제기'만 놓고 보자면 아주 효과적이긴 하다.  (김가진 페이스북)

 이는 익명 게시판과 대조적이다. 익명 게시판은 쉽게 의견이 오고 갈 수는 있지만 일차원적이고, 개인적이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엔 부족하다. 익명을 전제로 한 일방적인 의견 공유는 ‘제시’보단 ‘투기’에 가깝다. 따라서 지속적인 피드백이 설왕설래 가능한 매개체가 필요하며 거의 모든 학생이 참여해야만 하는 학생자치 의식 설문조사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화가 자리 잡히면 총학생회는 필요한 비판을 들을 수 있고 학생은 본인의 의사를 전달함과 동시에 소수라는 생각을 잊고 잠시나마 침묵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문공프와 시기가 비슷한 영어 프로젝트. 9/82로 처참한 응답률을 자랑한다. 이마저도 2~3명은 외부 학생이다. (김가진 사진첩)
전 학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로, 93명이 응답했지만 1학년은 약 40명 응답했다. (김가진 사진첩)

 또한, 학교는 이우학생들에게 1인 1자치기구를 권장할 필요가 있다. 동아리처럼, 1학년까지는 필수적인 단계로 만들어야 한다. 모두가 자치를 주도하면 동시에 모두가 자치에 따라오며 가치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비록 1학년이 2학년으로 올라가더라도 다음 1학년에게서 자치가 계속되며 선순환을 이끌어야 한다. 이런 일련의 사이클은 1인 1자치기구를 이우학교 특유의 문화로 만들어낼 수 있으며 학생과 학교의 가치 인식 격차를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예상한다. 이에 대한 일례로 문제공감프로젝트(이하 문공프)를 들 수 있다. 필자의 문공프 설문조사 진행을 떠올려보자면, 문공프 이전의 설문조사 참여율은 약 15%(±10)로, 1/5 정도를 웃도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말 ‘모두가’ 이행해야만 했던 문공프에선 약 48%(±10)의 참여율을 보여주며 역지사지(易地思之)-상부상조(相扶相助)의 용례를 정확히 체감할 수 있었다.



평균 1~2회가 가장 많지만, 자치 무경험자는 약 12%로 적지 않은 인원이다. (김가진 설문조사)

 통념적으로 이우학교의 구성원들은 적어도 한 번 이상의 자치를 경험해 봤을 것이라는 생각이 많아, 이는 실질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이 제기될 수 있다. 예로 든 문공프 역시 아주 특수한 상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허나 이는 통계적으로 사실이 아니며, ‘자치를 경험하는 것’과 ‘자치를 주도하며 동시에 참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실제로 자치의 경험이 많아질수록 자치에 대한 긍정 반응과 참여도는 커진다. [자치 활동에서 내 참여도는?]라는 질문에 대해 ‘높은 편’ 답변을 한 집단은 평균적으로 1.11회의 자치를 경험했고 ‘낮은 편’ 답변을 집단은 0.45회의 자치를 경험했다고 밝혔다. 표면적으로 ‘낮은 편’에 속한 집단 중 절반 이상이 다수가 자치를 1회도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임원과 자치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아 임원-비상설기구-자치기구를 모두 해본 학생은 26%밖에 없으며 그중 절반 이상은 고3이다.) 게다가 학생자치 긍정도는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반비례하게 된다. 통계로 살펴보자면, [본인은 이야기장 등 필수적인 자치 교육에 긍정적/부정적이다.]라는 질문에 1~5 사이의 숫자(1에 가까울수록 부정적, 5에 가까울수록 긍정적)를 골라 긍정도를 평가하게 했다. 1학년의 경우 평균 자치 경험 횟수가 가장 적은 약 0.5회였음에도 불구하고 평균 3.96점, 자치 경험 횟수 평균 1회2학년의 경우 3.57점, 평균 1.2회로 가장 많았던 3학년의 경우 3.1점으로 자치 경험과는 무관하게 긍정도가 줄어드는 양상을 드러냈다. 물론 이는 자치보단 학업과 관련된 부분이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즉, 자치 활동 횟수에 비례해 참여도가 증가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치 참여도가 하락하는 폭이 더 크다는 점. 그리고 참여도는 학업 압박과 높은 연관성을 지닌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꾸준한 자치교육보다는 입학 초기에 진행하는 등 자치교육이 이르면 이를수록 더욱 효과적일 것으로 보인다.



 앞선 총학의 부재, 번져가는 침묵, 고약해진 자치 인식 탓에 시스템의 개선 없이 학생에게 호소하고 울부짖는 것은 이제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한 때라는 뜻이다. 학생들에겐 실효적인 방법과 총학의 결단이 절실하다.



다음은 통계자료에 대한 분석이다.


(설문조사 전, 높은 자치경험 횟수는 자치교육에 대한 높은 긍정도를 수반할 것이라 예상했다.)


설문조사 결과 스프레드시트 링크: https://docs.google.com/spreadsheets/d/1-qg_qW9O_eX3RcSyi7HzCDwjYbyKvBSJjgqFyqXbL4c/edit?usp=sharing 


[배경설명]

 표본인 설문 응답자의 수는 99명으로, 모집단은 현 이우고등학교 인원 241명이다. 응답률은 약 41%이다. 모집단의 학년 비율은 약 1:1:1 (고1:고2:고3)로 거의 동일하며, 표본의 학년 비율은 약 26:28:46이다. 고3 전체적으로 자치에 대한 긍정도가 낮다는 점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통계 결과가 자치에 대해 조금 더 부정적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가중치를 부여하는 방법도 있겠다만, 학생 자치에 대한 평가도가 개인 성향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기에 하지 않았다.


[신뢰수준 분석]

N(모집단의 크기), Z(신뢰수준), e(오차범위)

N: 241, Z: 80%, e: ±5%p이며 표본크기는 98이다.

따라서, 신뢰수준은 약 80%(±5%p)이다. (100번 시행했을 때 약 80번 정도 같은 결과)


- [본인은 이야기장 등 필수적인 자치교육에]라는 질문에 1~5(1에 가까울수록 부정, 5에 가까울수록 긍정) 점수를 선택하라 했을 때, 여성 집단의 경우 평균 약 3.7의 점수를 매겼고 남성 집단의 경우 평균 3.3의 점수를 매겼다. 기타 성별의 경우 평균 2.5점을 매겼다. 여성 집단이 남성 집단보다 필수적인 자치 교육에 더 긍정적이었다. (여성 응답자는 45/99, 남성 응답자는 51/99, 기타 응답자는 3명이다.)(다만, 고3 응답자와 남성 응답자. 즉, 고3 남성 표본이 많기 때문에 고1, 고2 등 나머지 학년의 남성 집단의 긍정도가 오분석됐을 여지가 있다. 고3 남성의 평균 긍정도는 약 2.9점이며 고3 여성의 평균 긍정도는 약 3.6점이다. 따라서, 고1-2 남성의 평균 긍정도는 약 3.5점, 고1-2 여성의 평균 긍정도는 약 3.75이다.) 결과적으로, 여성 집단이 남성 집단보다 필수적 자치 교육에 긍정적이었다.

- [이우고 학생자치 임원 경험]이 많을수록 자치교육에 긍정적이다.

- [이우고 비상설위원회 경험]이 많을수록 자치교육에 긍정적이었지만, 큰 차이를 보이진 않았다.

- [이우고 자치기구 경험]이 많을수록 자치교육에 긍정적이었고, 4회 이상이 특히 가장 두드러지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 [다른 학생들은 나보다 자치에 관심이 적다][매우 동의]를 선택한 집단이 자치교육에 가장 부정적이었으며, 집단군도 본인들의 현재 상황을 인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자치 활동의 문제는]이라는 질문에 [참여자에게 있다]라고 주장한 집단이 자치교육에 가장 긍정적이었고 다음으로 [복합적이다] 집단이 잇따랐으며 [자치 주도층에 있다]라고 주장한 집단이 가장 부정적이었다. [참여자에게 있다] 집단과 [자치 주도층에 있다] 집단의 자치교육 긍정도 차이는 1.5 정도(참-3.8, 주-2.3)이다. 또, [참여자에게 있다]라는 집단의 약 50%는 고1이다.

- [필수적 자치교육에 대한 긍정도]에 대해선 고1이 3.96으로 가장 높았고, 고2가 3.57, 고3이 3.17이었으며 나이에 따라 순차적으로 하락하는 것을 알 수 있다.

- [필수적 자치교육에 대한 긍정도]에 대해 긍정도 2, 3, 4의 평균 자치 경험 횟수가 비슷하고 긍정도 5의 평균 자치 경험 횟수가 가장 높으며 긍정도 1의 평균 자치 참여 횟수가 가장 낮은 것으로 보아, 극단적인 영역에는 자치 경험 횟수가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만, 산술적 중간 영역에선 개인의 성향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 [공공의 문제는 자치에서 해결될 수 있다]라는 질문에 비동의(매우 비동의 제외)를 선택한 집단이 [비상설위원회 경험 횟수]가 가장 높았는데, 집단 중 약 44%가 고3이기에 발생한 지표일 것으로 예상된다.


[요약]: 일반적으로, 높은 자치경험 횟수는 자치교육에 대한 높은 긍정도를 수반했다. 다만, 개인의 자유도를 억압할 수 있는 ‘필수적’ 항목에서는 자치경험 횟수보다 개인적 성향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출처:

「집단행동의 논리」-맨슈어 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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