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예듬 Jul 15. 2023

인생 첫 제모


초등학생의 나는 털을 없애기 위해서 팔, 다리에 있는 털을 박박 문질러도 보고, 가위도 잘라도 보고, 뽑아도 봤지만 피부 깊숙이 박힌 털을 제거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반소매를 입을 때 혼자 계속 긴 옷을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종종 반바지를 입으면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었지만, 그럴수록 더 눈길이 갔다. 어린 나이에 털이 많아봤지 얼마나 많을까 싶지만, 그땐 털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블 tv 방송이 끝나고 한 광고가 나왔다. 외국인들이 나오고 한국 성우가 더빙을 한 그때 그 시절 홈쇼핑 광고였다. 광고에선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굵은 다리가 나오더니 '제모 어려우시죠? 이젠 한 번에 해결하세요!'라는 멘트가 나왔다. 그리고 끈끈한 액체를 다리에 바르고, 흰 천을 덮은 뒤 문질문질한 다음 떼어내니 그 많던 털들이 흰 천에 붙었고, 다리도 말끔해졌다. 신세계였다. 그 '털 뽑는' 광고를 보면서 나도 저것만 있으면 털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계속 사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슈가링 방식인 것 같은데, 2000년대 초반이라 왁싱의 개념이 많이 자리 잡히지 않았고 어렸기 때문에 '털 뽑는 거'라고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문제의 '털 뽑는 거'는 가격이 그리 저렴하진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엄마는 나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털 뽑는 거'를 선물로 사주셨다.'털 뽑는 거'가 집으로 도착하던 날, 이제 보기 싫은 털들을 다 없애 버릴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들떴다.


당시에 나는 어렸기 때문에 엄마가 도와주기로 했다. 구성품은 사용설명서, 끈적한 액체가 담긴 흰 통, 스파출러, 흰색 거즈가 있었고 엄마는 사용법을 꼼꼼하게 읽었다. 흰 통을 열어보니 노란색과 연두색 사이의 끈적한 액체가 있었고, 꿀처럼 달콤한 냄새가 나서 찍어 먹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천연 성분으로 만든 제품이라고 광고를 해서 엄마가 사준 게 아닌가 싶다.


엄마는 스파출러로 꿀 같은 액체를 퍼서 내 팔에 올리고 펴 발랐는데 끈적한 액체에 털이 엉키면서 따가운 느낌이 들었고, 등에 닭살이 오도도 돋았다. 그 후 흰 거즈 천을 팔에 올리고 문질문질 했다. '정말 이렇게 하면 털이 없어질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느 정도 털과 액체, 거즈가 혼연일체가 된 느낌이 들었을 때였다. 엄마는 한 손으로는 내 팔을, 다른 한 손으론 거즈를 잡고 말했다.


"뜯는다! 하나, 둘, 셋"

"악!!"


눈을 질끈 감았다 떠서 팔을 보니, 내 털들이 다 뽑혀 나가 있었고 털에 가려진 흰 피부가 드러났다. 너무 따가워서 눈물이 찔끔 났지만, 보기 싫은 털들이 없어져서 속이 시원했다.


"엄마 다른 쪽도 해줘"


그날 팔과 다리에 있는 털들을 모조리 뽑았다. 대신 피부가 여렸던 탓에 빨개지긴 했지만, 화끈 거리는 통증보다 털이 없어졌다는 행복이 더 컸다.


다음 날, 나는 반소매 옷을 입고 당당하게 등교를 했다. 친구들이 알아차리지 못해도 뿌듯했다.


'나도 이제 너희들처럼 털 없다!'


 


이전 02화 털의 기원을 찾아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