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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펜 Apr 22. 2023

피부 때문에 맛있는 것도 마음대로 못 먹겠어

노화 - 피부

"나이 들어가는 것은 곧, 우리의 모든 감정이 얼굴과 피부에 기록되는 과정이다."

— 앤 라모트 (Anne Lamott)


어릴 적 ‘묘기대행진’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지금의 ‘진기명기’나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그램이다. 서커스를 하는 사람, 암산을 잘하는 학생, 지폐를 손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세는 은행원, 특이한 신체 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등장했다. 그중에는 피부를 긁으면 자극된 부분이 붉게 부풀어 오르는 ‘묘기증’을 가진 사람도 나왔다. 내 피부도 그랬다. 어머니는 친척들이 모이면 내 등을 까서 손으로 글씨를 쓰거나 병뚜껑을 눌러 붉게 부풀어 오르는 내 피부를 보여주곤 했다. 나는 신기해하는 친척들 앞에서 마치 묘기의 주인공이 된 듯 뿌듯해했다.


하지만 피부는 그만큼 예민했다. 조금만 긁히거나 베여도 상처가 잘 아물지 않았고, 밴드를 붙이면 그대로 곪아버렸다. 포경수술 후 자연스럽게 녹아야 할 실도 녹지 않고 화농이 생겼다. 비뇨기과 의사는 이런 경우는 처음 본다며 실을 제거하고 약을 처방해줬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우리는 태국으로 휴가를 갔다.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카오산 로드는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행자들로 북적거렸다. 거리 양옆으로는 액세서리, 크레페, 옷, 음료수를 파는 노점상들이 줄지어 있었다. 작은 딸은 여행 전부터 카오산 로드에서 레게 머리를 하고 싶다고 졸랐고, 마침 거리에 간이 의자를 놓고 레게 머리를 땋아주는 곳이 있었다. 한국 돈으로 약 2만 원 정도였고, 딸은 땡볕에서 오랜 시간을 앉아 머리를 땋았다. 우리는 그동안 근처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는데, 헤나 문신을 해주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지의 흥분 때문이었을까, 나는 커다란 코브라 그림을 팔뚝에 그려 넣기로 했다.


처음에는 거울 속 팔뚝에 새겨진 커다란 뱀이 나를 더 강하고 멋있어 보이게 하는 것 같아 뿌듯했다. 그러나 며칠 뒤, 팔뚝이 가렵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온 후 증상은 더욱 심해졌다. 문신을 한 자리를 따라 피부가 붉게 부풀어 오르고, 가려움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손톱으로 살갗을 긁어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실감했다. 매일 밤, 오늘은 덜 가렵기를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 고통은 거의 한 달 동안 지속되었다.


예민한 피부 때문에 나는 스킨 로션도 여성용을 사용한다. 피부는 항상 신경을 써야 했고, 언제든 불편이 생길 상황에 미리 대비해야 했다. 나이가 들면서 또 다른 증상이 나타났다. 음식을 먹고 나면 턱선과 이마 옆에 모기에 물린 듯 가려운 발진이 생겼다. 주로 외식을 한 후 나타났고, 때로는 집에서 먹은 음식도 원인이 되었다.


증상이 나타나면 아내에게 전날 먹었던 메뉴를 다시 확인하곤 했다. 어떤 음식이 문제인지 알아내고 싶어서였다. 몇 번은 받아주던 아내도 결국 화를 냈다. “아이들도 먹는 좋은 재료로 요리하는데, 음식에 트집을 잡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국 음식으로 원인을 찾지 못해 알레르기 검사를 받기로 했다. 진드기, 집먼지, 고양이 털은 물론 자작나무, 소나무, 쑥 같은 식물과 곰팡이 등도 검사 대상이었다. 우유, 돼지고기, 콩, 호두, 복숭아, 감자, 조개 등 다양한 음식에 대한 반응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야간 자율학습을 마친 딸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딸이 물었다.
“아빠, 알레르기 검사 결과 나왔어?”
“응, 아무 이상 없대.”
“뭐? 그게 다야? 황당하고 화가 나네.”

검사에서 이상이 없다고 해서 내 몸이 멀쩡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허리가 아파 MRI를 찍었지만, 이상이 없다고 해서 통증이 사라지는 게 아니듯 말이다. 예민하게 반응하니 혈액검사로 분명 무언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딸은 내가 필요 없이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결국 음식 추적도, 알레르기 검사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지금도 가끔 음식을 먹고 나면 발진이 올라오지만, 몇 시간만 지나면 진정되기 때문에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긴다. 일상에 큰 지장을 줄 정도의 불편함도 아니고, 여러 가지 노화 증상 중에서는 애교스러운 수준이다. 오래된 만년필을 쓰는 것처럼 약간의 불편함은 함께하면서 살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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