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떤 가족 08화

8. 고요한 너의 세상

귀가 들리지 않는 노견의 보호자가 된다는 것

by Skylar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삶을 시작했을 때 내가 느낀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언제든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존재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시츄는 활동성이 높지 않은 종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낸다. 그렇게 잠에 빠져 있다가도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자기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뛰어나와 인간을 반겨준다. 비록 그 에너지가 길게 가지는 않고, 혜리와 타니 모두 '응, 이만큼 했으면 됐지?'라는 태도로 언제 뛰어나왔었냐는 듯 쿠션에 올라가 잠을 청하기 일쑤지만 그 몇 분의 난리법석만으로도 내가 짊어지고 온 바깥세상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3년 전 봄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혜리가 뛰어나오지 않기 시작한 건. 타니는 언제나 후다닥 문 앞에 뛰어와서 나와 J를 반겼지만 혜리는 침대나 쿠션에 잠들어 있다가 뒤늦게 부스스한 얼굴로 깨어나곤 했다. 그 잠 덜 깬 얼굴이 귀여워서, 비틀비틀 일어나 꼬리를 흔들고 눈을 꿈뻑이며 뽀뽀를 하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우리는 웃곤 했다. 벌써 만 열두 살, 강아지가 나이를 먹으니 이렇게 잠을 깊이 자는구나... 했다.


하지만 단순히 깊은 잠 때문에 혜리가 우리에게 뛰어오지 못한 게 아니란 걸, 몇 개월 후 우리는 깨닫게 됐다.


혜리는 J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있다. 어릴 때부터 길러준 보호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혜리는 하울링 등 분리불안에 따른 여러 문제를 보이다가 J의 가족이 되었다. J는 J대로 삶의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힘든 시기에 혜리를 만났다. 둘의 특별한 유대관계를 보고 느낄 때마다, 나는 저 둘은 전생에 틀림없이 특별한 사이였을 거라고 생각하곤 한다. 혜리는 잘 먹고 놀다가도 J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다가도 한 번씩 깨서 J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고 간다.


그날도 혜리는 거실에서 잘 먹고 마시고 쉬다가 J의 안위가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마침 우리는 모두 거실 바닥에 앉아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혜리가 J를 찾아 방으로 후다닥 갔다. 혜리야 아빠 여기 있어, 하고 부르는 J를 완전히 등지고서였다.


"혹시 혜리가... 귀가 안 들리나?"


불현듯 J가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그래서.......

노견은 이렇구나, 생각하며 무심코 넘겼던 혜리의 변화들이 한순간 이해되면서 동시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혜리는 큰 소리를 내는 것들을 무서워했다. 무서우면 피하는 방법도 있건만, 싸움닭 기질의 혜리는 맞서서 짖고 달려들었다. 그래서 청소를 할 때마다 전쟁이었다. 진공청소기를 들고 밀어도, 로봇 청소기를 가동해도, 혜리는 청소가 끝날 때까지 청소기와 싸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청소기의 존재에 심드렁해졌고 더 이상 싸움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게 나이를 먹어서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청소기 모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두렵지도 않은 거라는 걸 몰랐다.


산책, 이라는 소리에 젊은 타니보다 더 격하게 반응하던 건 늙은 혜리였다. 산책 갈까? 나갈까? 하는 말에 좋다고 용수철처럼 뿅뿅 튀어 오르는 네 발 털뭉치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산책이라는 말을 자꾸 반복하며 혜리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길 좋아했다. 그런데 산책 가자, 해도 혜리가 꿈쩍하지 않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혜리가 갑상선기능저하 진단을 받아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때쯤이었다. 심하게 피곤해하고 움직이지 않으려 하던 혜리가 처방약을 먹고 조금씩 기운을 차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행이라고, 이제 산책 가자는 말에도 다시 기뻐하며 깡충깡충 뛸 거라고 생각했다. 혜리가 산책 가자는 우리의 말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거라는 건 상상하지 못했다.


동물병원에서 청력이 소실된 것 같다는 진단을 받고도, 경험적으로 혜리가 듣지 못하게 됐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처음엔 희망을 놓지 못했다. 귀세정제 부작용일 수도 있다고, 다른 제품을 쓰면 청력이 돌아올 거라고 희망회로도 돌려 봤다. 어느 정도로 목청을 높여 말하면 혜리가 반응하는지 자꾸 확인하면서 청력의 개선 여부를 가늠하려 했다. 하지만 혜리의 청력은 점점 약해지기만 할 뿐,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동안은 혜리가 청력을 잃어서 어쩌지, 하며 절망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지내보니 불편한 건 나의 마음일 뿐 혜리가 힘들 건 없었다. 오히려 혜리는 주변 소음에 아랑곳없이 더 잘 자게 됐다. 청소기나 각종 기계 소리에 스트레스받으며 짖을 필요가 없어졌다. 시츄 치고는 성격이 뾰족한 혜리였는데, 이전보다 평화로운 마음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다만 아무래도 주변 기척에 둔해지기 때문에, 나나 J가 일상생활 중 혜리와 부딪치는 일은 늘었다. 뒤쪽에서 다가가 접촉할 때면 아무리 터치가 부드럽다 해도 순간 놀라서 딸꾹질을 하는 일 또한 많아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사람이 조심할 일이지, 혜리가 애써서 해결할 일은 아니다.


이제는 우리도 혜리가 들을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으로 외쳐 말하지 않는다. 대신 더 환하게 웃으며 혜리를 바라보고 더 또렷하게 눈 맞추며 큰 입모양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지저분한 것에 입을 갖다 대거나 하는, 정말 안 되는 행동을 할 때면 손가락을 들어 안 된다는 표시를 한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혜리는 우리의 메시지를 다 인지한다. 다만 제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들을 뿐이다. 청력은 잃었지만, 부엌에서 간식 봉지를 뜯는 순간 침대방을 박차고 뛰어나오는 초능력을 보여준다. 열 다섯 견생, 연륜이 어디 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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