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마음으로 원하던 간호학과에 진학하고 1, 2학년이 지나 어느덧 3학년이 되었을 때이다. 내가 다닌 대학교는 3학년이 되면 병원으로 직접 실습을 나간다. 병원 현장은 어떤 분위기인지, 병동마다 어떤 일을 하는지, 각 과에서 어떤 환자를 보는지 등을 미리 보고 적응하며 나에게 어떤 병동 혹은 어떤 과가 맞는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다.
3, 4학년 동안 내과병동, 외과병동, 중환자실, 수술실, 분만실, 신생아실 등 다양한 과를 실습했는데 그중 가장 재미있어 보였던 곳은 외과병동과 응급실이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업무가 가장 재미있고 활력 있어 보였다.
취업 후 어느 부서에서 일하고 싶은지 설문을 받을 때 원래대로라면 응급실을 일 순위로 적었어야 했는데 어떤 마음에서였는지 외과중환자실을 일 순위로 적어냈다. 아마 그 당시 중증외상센터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그와 비슷해 보이는 외과중환자실로 결정한 듯하다.
그렇게 들어간 중환자실은 온갖 기계와 다양한 유형의 환자, 수없이 들어가는 수액들로 정신없이 돌아갔다. 내가 원했던 모습이면서 한편으론 낯선 모습에 많이 떨렸다. 병동과 같이 나의 1년도 정신없이 돌아갔다. 매일 공부하느라 2~3시간만 자고 출근하는 게 일상이었고, 쉬는 날이면 밀린 공부를 하고, 정신없이 잠을 자는 나날을 보냈다.
나의 신규 1년이 끝나고 업무에 적응되어 자연스럽게 해야 할 것들을 하던 때였다. 순간 매일 다른 환자분을 보며 해야 할 것을 정신없이 쳐내는 이 모습이 정말 환자분에게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원했던 건 최선의 간호를 하며 환자분이 좋아지는 것을 보고, 내가 한 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는 거였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한 명 한 명 소중히 돌볼 시간은커녕 스스로를 간호할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몸은 점점 축났고, 몸과 함께 마음도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에크모팀에서 인력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3교대 근무와 정신없이 살아가는 삶이 힘들던 차에 데이 근무만 진행되며 팀으로 이뤄지는 그곳은 내가 원하던 병원의 삶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부푼 꿈과 기대를 안고 들어온 에크모팀은 꽤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부서였다. 지식의 깊이가 달랐고, 환자분을 대할 때의 모습 또한 달랐다. 이에 따라 내가 공부해야 하는 범위의 양은 더 많아졌지만 그만큼 보이는 것 또한 더 많아지고 다양해졌다. 에크모에 관해 설명된 책이 있는데 이 책은 간호학과 전공 서적만큼이나 두껍다. 그만큼 내용이 엄청나고, 한 페이지마다 들어있는 내용은 너무 어려워 공부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것을 공부하고 배울 수 있음에 즐거웠고, 조금 더 멋진 사람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한 일이 즐거워 이 팀에 지속적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특별히 에크모는 심장과 폐를 대신하는 기계인 만큼 대부분의 심장이식 혹은 폐 이식 대기자분들이 에크모를 시행한다. 그래서인지 처음 에크모를 시행한 시점부터 이식 전, 이식 후, 마무리까지 지켜보게 된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기에 그분들과 깊은 유대감을 쌓게 되고, 회복되어 퇴원하게 되는 순간에는 감격스러울 만큼 큰 기쁨을 느낀다. 그분들도 우리가 고생한 걸 알아주시듯 퇴원하실 때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리시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도 뒤에서 몰래 눈물을 참는다. 이런 사건 하나하나가 다시금 일하게 하고, 마음을 다잡게 한다.
물론 정말 원하던 곳이고, 즐겁게 일하고 있는 곳이라고 해도 당연히 힘든 것도 있다. 깊이가 너무 깊기에 내가 따라가기 벅찰 때도 있고, 지금은 부서 상황상 다시 3교대를 하게 되어 몸이 안 좋아지기도 한다. 삶의 끝자락에서 정신없이 저승사자의 멱살을 잡고 있노라면 ‘백의의 전사’가 된 기분이다.
하지만 이렇게나마 꿈꿔왔던 누군가의 영웅이 되는 모습에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준비하여 병원에 갈 준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