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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경 Mar 03. 2021

영선이

사물이 있던 자리⑨ 만화방

영선이를 다시 본 건 ‘까치 만화방’ 앞이었다. 불량만화와 불량식품과 불량 청소년들이 고여 드는 곳. 어두컴컴한 만화방에서 나와 구멍가게를 향해 뛰어 간 아이는 틀림없이 영선이었다.


구멍가게에서 나온 영선이는 곧바로 만화방으로 되돌아갔다. 손에는 담배 한 갑이 쥐어져 있었다. 만화방  미닫이문을 열려다 말고 멈칫 뒤돌아봤다.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던 날 알아본 것이다. 그 애와 눈이 마주친 건 거의 2년 만이었다.     


영선이와 난 같은 반이었다. 아무리 뜯어봐도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이목구비, 또래에 비해 키도 작고 두어 치수는 큰 것 같은 운동화를 질질 끌고 다녔던 영선이.  


그 애는 말 한마디를 똑 부러지게 못해 선생님을 답답하게 했다. ‘또 지각이니?’, ‘준비물은 안 가져왔니?’ 선생님이 다그칠수록 우물쭈물했다. ‘예’ 혹은 ‘아니요’를 제대로 못해 혼나기 일쑤였다. 걸핏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것도 영선이에겐 불리한 점이었다. ‘아니요’ 말하고 싶어도 벌겋게 달궈진 얼굴은 이미 ‘제 잘못이에요’ 자백하고 있었다.     


매일 가져와야 하는 색연필을 집에 두고 왔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영선이를 떠올렸다. 그 애한테 빌려달라고 하면 분명 거절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선이는 선뜻 열두 개짜리 색연필 세트를 내밀었다. 배시시 웃기까지 했다. 우리 반에서 영선이에게 말을 거는 아이는 없었으니까.     

 

수업 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영선이의 책상 위에 색연필이 없다는 걸 단박에 알아봤다. "또 안 가져왔니?"

선생님이 다그치기 시작했다. 영선이가 궁지에 몰릴수록 나는 죽을 맛이었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영선이는 복도로 쫓겨났다.


수업 내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색연필 몇 개만 빌려도 됐는데 멍청하게 세트  받아 들다니. 준비물을 빠뜨린 건 걔가 아니라 나라고 실토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학년이 끝날 때까지 나는 양심의 무게에 짓눌려야 했다. 영선이가 말을 붙이면 마지못해 대꾸해 줬고 같이 놀자고 하면 말없이 따라나섰다. 다음 해 다른 반이 됐을 때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드디어 빚을 다 갚은 것 같았다.      


그 애가 우리 반에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았다. 우연히 마주쳐도 모른 척했다. 다신 죄책감의 그늘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영선이는 눈에 띄지 않았다. 다른 학교로 전학 갔는지도 몰랐다. 그 무렵 주변에 새 학교가 문을 열었고, 멀리서 등교하던 애들이 단체로 전학 간 일이 있었다.     


“만화 볼래?”

만화방 문을  열다 말고 영선이는 내게 다가와 배시시 웃었다.     

 사방 벽 가득 만화가 널려 있는 곳. 그곳은 ‘강가딘’이나 ‘꺼벙이’, ‘로봇찌빠’의 세계와는 달랐다. ‘까치’와 ‘엄지’, ‘마동탁’의 세계였다. 삼각관계와 야심과 순정이 있는 곳이었다. 50권이 넘는 이현세의 외인구단 시리즈물이 벽면 가득했다. 주인공들이 옷만 바꿔 입고 다른 제목을 달고 나온 것이 또 수십 권이었다. 박봉성이라든가 허영만 같은 작가의 시리즈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만화방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제 와 새삼 영선이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죄책감에 짓눌렸던 시간들은 달콤한 유혹 앞에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만화방을 드나들며 불량만화를 읽다가 선생님께 걸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선생님은 종례 시간마다 만화방에 가지 말 것을 경고했다     


“공짜로 보게 해 줄게.”

두 번째 유혹은 더 달콤했다.     


담배연기가 자욱한 그곳엔 중·고등학생 오빠들과 아저씨들이 만화책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 쫀득이를 뜯는 사이 낄낄 웃는 소리 들렸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학교 선생님이 하루도 빠짐없이 추방을 외치던 불량만화는 천국의 성서였던 것이다.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만화방에 드나들었다. 영선이는 내가 오는 걸 무지 좋아했다. 그 애는 만화방에서 손님들의 잔심부름을 하며 반찬값을 벌고 있었다. 할머니와 둘이 산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심부름을 가지 않으면 내 옆에 꼭 붙어 앉아 함께 만화를 봤다. 아저씨들이 우리가 귀여웠는지 간혹 쫀드기 같은 걸 구워주기도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만화책을 얼마든지 꺼내 봐도 돈 달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만화방에 들어가다 선생님께 딱 들키고 말았다. 엄마가 학교로 호출됐다. 그날 저녁 나는 죽지 않을 만큼 회초리로 맞았다.   

  

며칠 후 만화방 앞에서 마주친 영선이는 요즘 왜 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추위에 코가 빨개진 채 맨손에 동전을 꼭 쥐고 있었다. 심부름을 가던 길 같았다. 나는 다시는 만화방에 가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내가 돈도 다 내주었는데….”

처음 듣는 소리였다. 주인아주머니는 내가 본 만화 값을 영선이의 심부름 값에서 제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멍청하게도. 정말, 멍청하게도.


안 그래도 친구가 없는 영선이었다. 만화방에 드나드는 아이는 불량만화나 불량식품과 매한가지였다. 친구가 그리웠던 영선이는 그렇게라도 나를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잘 가. 한참 또 못 보겠지…?”

영선이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나는 뛰기 시작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죄책감을 떨쳐내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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