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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경 Feb 03. 2021

이별 전화국

사물이 있던 자리⑤ 다이얼 전화기

우리 집에 전화기가 생겼다! 동네에서 제일 먼저 생겼다. 그것도 백색 전화기. 그건 오로지 아빠가 우리 동네 통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70년대, 전화기는 두 종류가 있었다. 백색전화와 청색전화. 청색전화는 소유권이 전신전화국에 있었다. 필요 없을 땐 반납해야 했으며 반납하면 보증금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백색전화는 개인 소유였다. 사고팔 수 있는 재산목록 중 하나였다. 백색 전화기를 설치하려면 우선 신청을 해야 했다. 신청을 했다고 순서대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추첨을 했다. 당첨은 지금의 아파트만큼이나 어려웠다.


우리 집은 당첨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통장에겐 우선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 출장이 많았던 아빠가 통장 일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민방위 훈련, 야간등화관재훈련이 있는 날 노란 완장을 차고 동네를 순찰하는 것 정도였다. 선거인 명부나 전입자 확인 같은 일은 엄마가 처리했을 것이다. 내가 아빠의 완장을 확인한 것은 전화가 개통됐을 때였다.


웬만한 부잣집에도 없는 전화기가 우리 집에 생기던 날, 할머니와 엄마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이웃사람들이 구경 오기도 했다. 나도 덩달아 신났다. 우리 아빠가 벼락출세라도 한 것 같았다.


열개의 구멍이 뚫린 다이얼 전화기였다. 때르륵 때르륵 번호를 돌릴 때마다 쌍둥이처럼 돌아가던 열 개의 투명한 아크릴 구멍. 가운데엔 ‘용건만 간단히’라는 글자와 함께 빈칸이 남겨져 있었다. 우리 집 전화번호를 적어 놓는 자리였다. 그래야 이웃들이 다른 사람에게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으니까. 사람들은 마당을 서성이다가 전화벨이 울리면 식구보다 먼저 전화기 앞에 바짝 다가앉았다.


그날, 기진 언니도 그랬다.


언니는 동네에서 머리카락이 제일 길었다. 긴 머리 여자에 대해 시대적 로망이 있었던 건지, 나 같은 꼬마도 허리까지 머리를 길렀다. 동네 처녀들도 한결같은  스타일이었지만 누구도 기진 언니의 길고 새까맣고 윤이 나는 머리칼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점심나절부터 언니는 막 감고 나온 젖은 머리칼로 우리 집 마당을 서성였다. 앞집 아주머니가 가끔 엄마를 찾아와 딸 걱정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나는 언니가 연애 중인 걸 알고 있었다. 걸핏하면 밖으로 나돌고 밤늦게 술 취해 들어온 적이 있다는 것도. 


엉덩이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한밤중에 술 취해 춤추듯 걸어가는 언니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나 같은 어린애는 감히 넘볼 수 없는 검은 밤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언니. 기진 언니는 마녀처럼 내 꿈을 휘저은 적도 있었다.


기진 언니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나는 수돗가에 그려 앉아 물장난을 했다. 학교 간 언니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수술 후 언니의 신장은 무사했다. 시간이 지나며 찬찬히 어루만진 덕이었다. 벌써 2학년이 됐지만 문제없이 학교도 잘 다녔다. 


엄마는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서면서 언니가 돌아오면 냉장고에서 하드를 꺼내먹으라고 일렀다. 내가 떼쓸까 봐 미리 사둔 것일 테지만 난 매달리지 않았다.  어차피 두고 갈 테니까.


기진 언니 끄는 슬리퍼 소리와 내가 물을 휘젓는 소리가 간간히 섞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깜짝 놀랄 만큼 다. 나는 대야를 차며 벌떡 일어났다. 발등에 물이 엎어졌다. 기진 언니가 다급한 눈짓 보냈다. 

어서 받아.

나는 우물쭈물 물러났다. 전화 기다린 건 내가 아닌데.

 

“받아봐, 얼른.”


언니가 재촉했다. 아무리 꼬맹이지만 집주인이 있으니 선뜻 전화기를 들지 못했다.  언니는 수줍은 마녀 인지도 몰랐다. 나는 놀란 얼굴로 전화기와 언니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답답했던지 언니가 전화기 앞으로 갔다. 잠시 망설인 뒤 가만히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 뒤언니는 아무 말이 없었다. 듣기만 하다 조용히 전화기를 내려놓더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문을 걸어 나갔다.

짙은 밤색 원피스를 입은 언니의 등짝이 검게 젖어 있었다.  채 마르지 않은 긴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전화를 제때 받지 못한 내 탓 같았다. 언니가 낙담한 게 전부 나 때문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데…. 어서 언니를 달래줘야 할 것 같았다. 틀림없이 전화 속 목소리가 언니를 찾을 것 같아 그런 거라고.  전화를 받을 줄 몰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고.


기진 언니는 자기 집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나는 다짜고짜 냉장고에서 꺼낸 하드를 내밀었다. 언니는 물끄러미 날 바라봤다. 까맣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을 얼굴에 반쯤 드리운 채로.


방에서 나온 아주머니가 내게 웬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언니에게 하드를 내밀었다. 기진 언니가 마지못해 그걸 받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포장지를 벗겨 한 입 베어 물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아니, 얘가 왜 이래? 너, 무슨 일 있어, 엉?”

아주머니가 당황해서 기진 언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언니는 달달하고 차가운 하드를 조금씩 깨물며 계속 울기만 했다.


나는 결심했다. 전화벨이 또 울리면 다시는 언니가 받지 못하게 해야지. 이 동네에 살지 않는다고 잡아떼야지. 밤을 타고 영영 사라져 버렸다고 해야지.


언니는 엉엉 울었다. 손에 쥔 하드가 녹아 없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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