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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경 Feb 17. 2021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

사물이 있던 자리⑦ 조개탄

눈발이 느릿느릿 내렸다. 교실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다.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오느라 애들이 늦는 모양이었다. 항상 제일 먼저 오는 정수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목을 길게 빼고 창밖을 내다봤다. 정수는 내 주번 짝이었다. 교문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이 하나 둘 보였지만 정수는 없었다.


겨울엔 주번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교실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무쇠난로 때문이었다. 조금 있으면 선생님이 오실 텐데 양철통에 조개탄이 가득 담겨 있지 않으면 분명 꾸중을 들을 것이다.


가까이 앉으면 더워서 쩔쩔맸고 멀어지면 추워서 발을 동동 굴러야 했지만 그 겨울을 버틴 것은 무쇠난로 덕이었다. 주번은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등교해 난로에 불을 붙여놓아야 했다. 신문지에 불을 붙여 난로 속에 던져 놓고 마른 장작을 몇 개 넣는다. 그다음이 조개탄 차례였다.


조개탄은 무연탄에 숯가루, 콜라이트 등을 첨가해 조개 모양으로 만든 연탄이다. 양철통에 가득 담으면 혼자 힘으로 들어 올리기엔 벅찼다. 선생님은 남학생과 여학생 짝을 지어 주번을 정했다. 내 짝 정수는 힘도 세고 손도 커서 창고에서 조개탄을 가져오는 일쯤 혼자 거뜬히 해냈다. 난로에 불을 붙이는 일도 정수의 몫이었다. 주번이 아닌 날에도 선생님은 성냥불 긋는 일은 걔한테만 맡겼다. 수돗가에서 커다란 주전자 가득 물을 받아와 난로 위에 올려놓는 일은 내 몫이었다.


2교시가 끝난 뒤 아이들이 난로 위에 마구잡이로 올려놓는 도시락을 정리하고, 3교시쯤 도시락의 위아래 순서를 바꿔놓는 일도 주번이 해야 할 일이었다. 도시락을 맨 아래 놓거나 중간쯤 놓는 일은 주번만이 할 수 있었다. 학교에 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수의 도시락을 맨 아래 놓아줄 생각이었다.  


손 빨갛게 얼어가며 주전자에 물을 받아 놓았는데도 정수는 오지 않았다. 나는 장갑을 단단히 끼고 난로 옆에 놓인 양철통을 들었다. 조개탄을 받아오는 창고는 교사(校舍) 뒤편에 있었다. 건물이 산 바로 아래 있는 까닭에 창고에 가려면 약간 경사진 길을 올라야 했다. 올라가는 것도 문제지만 무거운 조개탄을 들고 내려오는 길이 더 문제였다. 


창고 앞에는 다른 반 주번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정수를 기다리느라 늦장을 부린 게 후회됐다.

 ‘하필 오늘따라 늦을 게 뭐야.’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런 것처럼 괘씸했다. 그러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디 아픈가? 오늘따라 미장원 난로에 불이 잘 안 붙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수 엄마는 우리 동네에서 미장원을 했다. 정수는 등교하기 전 매일 미장원 난로에 불을 붙이고 온다고 했다. 선생님이 정수에게만 난로를 맡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엄마는 거기서 꼭 머리를 했기 때문에  하굣길에 미장원 안쪽을 기웃거리는 게 습관이 됐다. 정수 엄마는 고데기로 손님 머리를 만지기도 하고, 가게 안쪽 주방에서 고구마 같은 걸  내오기도 했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세련된 올림머리를 했는데, 귀밑머리 한 올은 턱 선을 따라 늘어지게 했다.   

  

정수 아빠는 먼 곳에서 일한다는 얘기만 들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집에 들른다고 했다. 정수는 그때마다 새 옷을 입고 학교에 왔다. 새 옷을 입고도 좋은 기색 없이 종일 부루퉁한 얼굴로 있다가 학교가 파한 뒤에도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엄마는 미장원 여자가 팔자가 사납다고 말하곤 했다. 그 집 사내가 다녀간 날엔 미장원이 문을 안 연다고 했다. 다음 날 가보면 여자가 깨졌던가, 유리가 깨졌던가, 아무튼 어디 한 군데가 깨져 있다고 했다. 팔자가 사납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팔자 사나운 엄마랑 사는 정수가 왠지 안돼 보였다.  


어젯밤 걔 아빠가 돌아온 것일까? 혼이 났을까? 나는 흰 눈을 퍽퍽 차며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둘씩 짝을 지어 조개탄을 받아 든 아이들이 비틀비틀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눈길에 조개탄이 한두 개씩 떨어졌다.  

내 차례가 오자 소사 아저씨가 검은 창고 안에서 검은 삽을 쑥 내밀었다. 창고 안에는 조개탄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양철통을 놓쳤다.  

“넌 혼자 왔니?”

소사 아저씨는 삽에 담긴 조개탄을 와르르 양철통에 쏟아냈다. 나는 입이 얼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사 아저씨의 얼굴에는 심한 곰보자국이 있었다. 가까이 보니 더 무서웠다. 게다가 아저씨의 뒤에는 석탄 창고가 검은 아가리를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저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 곧장 시커먼 저승길로 떨어질 것 같았다. 내 뒤엔 아무도 없었다.


 “혼자 왔냐니까?”

나는 대답 대신 서둘러 양철통을 들고 돌아섰다. "조심해라!" 아저씨가 등 뒤에서 소리쳤다. 나는 비틀비틀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아가야! 아가야! 좀 서봐라.”

틀림없이 날 부르는 소리였다. 서기는커녕 냅다 뛰었다. 양철통에서 조개탄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수업 종소리가 들렸다. 운동장엔 지각을 면하려고 뛰는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급할수록 걸음이 더뎠다. 그러다 그만 엎어지고 말았다. 검은 진주알 같은 조개탄이 눈 위에 흩어졌다.

소사 아저씨는 바로 뒤까지 쫓아왔다.


“저기서부터 죄 흘리면서 왔잖니.”

아저씨의 작업복 안에는 조개탄이 가득했다. 아저씨는 조개탄을 양철통 안에 쏟아내곤 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몸이 순식간에 위로 붕 들어 올려졌다. 날 일으킨 뒤엔 시커먼 손바닥을 쑥 내밀어 내 얼굴을 쓱 문질렀다.  거침없는 손길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게 내 뭐라디. 거기 서보라고 그랬잖아. 흐흐흐."

허옇게 튼 입술 사이로 누런 이가 보였다.


나는 양철통을 들고 혼비백산 뛰었다. 창고가 멀어진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조개탄이 쏟아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정수가, 정수가 왔어야 했는데.

목구멍에서 울먹울먹 쏟아졌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선생님이 내게 왜 숯검댕이가 됐느냐 물었다. 정수는 늘 입고 다니는 회색 점퍼를 입고 능숙하게 신문지에 불을 붙여 난로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마른 장작을 뚝뚝 부러뜨리며 날 쳐다봤다.

정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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