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이 경 Mar 17. 2021

껍데기

사물이 있던 자리⑪ 2단 자석 필통

엄마에게 본차이나 접시와 자개 박힌 화장대가 있듯이 내겐 2단 자석 필통이 있었다. 자석 필통은 나의 가장 소중한 살림살이였다. 앞뒤로 열리는 폭신폭신한 자석 뚜껑, 10센티 짧은 자와 지우개가 쏙 들어가도록 만들어진 칸막이, 꽃분홍색 플라스틱 몸체에서는 부드러운 광채가 났다. 뚜껑 안쪽에 달린 자그마한 거울은 엄마의 화장대가 부럽지 않았다.      


한 없이 늘어지는 수업 시간엔 필통 뚜껑을 똑딱똑딱 열고 닫으면서 지루함을 달래곤 했다. 그때마다 작은 거울에 햇살이 반사돼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뚜껑을 닫으면 빛은 그 안에 고스란히 갇혔다. 공주, 아니 마녀의 살림살이라 할 만했다. 빛을 가두는 건 마녀가 하는 일이니까.      


나는 필통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내 필통은 친구들은 물론이고 우리 집 식구들도 섣불리 손대지 못했다. 그 안엔 스티커와 유리구슬, 잡지에서 오린 인형과 작은 보물들이 잠자고 있었. 마녀의 보물에 손대면 큰 소란이 일어난다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 아닌가.


어느 날 수업 중에 지우개를 꺼내려 자석 필통을 열었을 때 난 내 눈을 의심했다. 뜻밖에 보물이 하나 더 있었다. 반지였다. 흑진주를 가운데 두고 둘레에 큐빅이 촘촘히 박힌 진짜 반지. 나는 지우개를 꺼내려던 것도 잊고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한 짓이었다.      


엄마가 세수를 하려고 화장대에 반지를 빼놓았을 때였다. 마침 나는 곁에 있었고 우연히 필통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반지에 손이 갔고, 필통에 넣었을 뿐이다. 당연히, 흑진주 반지에겐 칠이 벗겨진 화장대보다 새 필통이 어울렸다. 게다가 바로 며칠 전 엄마는 수화기를 붙잡고 울먹였다. 전날 밤 아빠가 외박을 했던 것이다. 결혼반지 같은 건 내던지고 싶을 것이다. 없어져도 모를 것이다.       


엄마는 화장대로 돌아와 로션을 바르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필통을 꼭 안고 누웠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저녁 먹으란 소리에 잠이 깼고 밥을 먹고 난 후엔 늘 하던 대로 책가방을 미리 싸 두었다.  필통은 여는 때와 마찬가지로 가방 깊숙이 들어갔다.


하굣길에 뛰어서 집으로 갔다. 정말 훔치려던 것이 아니었다. 내 필통에 보석을 넣어두고 싶었을 뿐이다. 아주 잠깐만. 엄마가 알아채기 전 아무도 모르게 반지를 화장대에 올려두어야 했다.


헐레벌떡 마당에 들어서자 안방과 마루를 잰걸음으로 오가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머리가 헝클어진 것도 모르고 집안을 홀딱 뒤집어 놓는 중이었다. 날 돌아보지도 않고 밖에 나가 놀라고 했다.


난 책가방을 내려놓는 척 마루에 걸터앉았다.  반지가 내게 있다고,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필통이 반지를 품고 있다고 말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가 놀라고 했잖니!"

신경이 곤두선 엄마는 내 등을 세게 떠밀었다. 나는 그만 마루 밑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반지는 하루쯤 더 필통 안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엄마의 손가락에서 빠져나와봤자 기껏 가야 할 곳이 낡은 화장대이니까. 반지는 당연히 보석함에 있어야 한다.      


다음날도 엄마는 아빠나 할머니한테 들킬까 봐 드러내 놓고 찾지도 못하고 집이 비는 대낮에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반지를 돌려놓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두려웠다. 그렇게 찾던 반지가 내 필통 속에 있다고 하면 엄마는 어떤 얼굴이 될까.        


잠자리에 들기 전 자석 필통을 열어 반지를 꺼냈다. 훔친 반지는 마녀의 보석함이 썩 잘 어울렸다. 필통이 조개껍질처럼 입을 꽉 다물고 있는 한 아무도 찾지 못할 것다. 며칠 더 있으면 엄마도 포기하겠지. 필통은 언제까지나 비밀을 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뚜껑을 닫았다. 이제 필통은 마녀의 보석함이자 마녀의 공범자였다.


필통을 넣으려 책가방 지퍼를 여는데  할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급히 필통을 집어넣으려다 그만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꼭 다물렸던 뚜껑이 어이없이 활짝 열렸다.  반지가 데구루루 굴러 나왔다.  할머니 눈동자가 반지를 따라 굴러갔다.     


할머니가 날 봤다.  말없이 추궁하는 눈이었다. 나는 꽁꽁 었다. 그제야 할머니는 요 며칠 며느리의 낯빛이 좋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할머니의 눈빛이 변했다. '니가 훔쳤니?' 마음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는 눈이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얼마나 큰 잘못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돌멩이가 얹힌 마음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물이 목까지 차올라 울먹였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꼴을 보아하니 묻지 않아도 다 알겠다는 얼굴이었다.  엄마를 부르지도, 안방으로 건너가지도 않았다.  뜻밖에, 늙고 주름진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는 게 아닌가. 그리고 다섯 손가락을 펴고 가만히 바라봤다.


할머니의 손에는 은가락지 하나 없었다.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가락지는 홀로 두 아들을 먹일 때 전당포에 맡기곤 영영 찾아오지 못했다. 할머니는 다시 반지를 꺼내 머리맡에 놓더니 그대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필통은  뚜껑이 휑하게 열린 채 방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비밀을 잃어버린 채.       


다음날 할머니는 엄마에게 반지를 돌려줬다. 방구석 어딘가에서 나왔다고 했다. 엄마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오직 반지만이 중요했다.


비밀은 자석 필통에서 할머니에게로 옮겨갔다. 비밀을 잃은 자석 필통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아직 흠집 하나 없었지만 어쩐지 진주를 빼앗긴 조개껍데기 같았다. 하룻밤 사이에 필통은 껍데기가 되어 있었다.


         

이전 06화 밤비나 숨기기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사물이 있던 자리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시작하기

카카오계정으로 간편하게 가입하고
좋은 글과 작가를 만나보세요

카카오계정으로 시작하기
페이스북·트위터로 가입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