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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경 Feb 10. 2021

밤비나 숨기기

사물이 있던 자리⑥ 종이인형

동생과 나는 부자였다. 용돈을 많이 모았거나, 값비싼 학용품을 가진 게 아니었다.

남동생에겐 동그란 딱지로 꽉 찬 포대자루가, 내겐 갈피마다 종이 인형을 끼워놓은 <소년중앙> 잡지가 일곱 권이나 있었다.

 

용돈이 생기면 우리는 무조건 문방구로 뛰었다. 뱀 주사위 놀이판, 고무줄놀이를 할 수 있는 길고 검은 고무줄, 프라모델 장난감… 그곳엔 보물들로 가득했다. 나는 동생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각자의 관심 품목을 수집하는 데만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문방구 매대 위에는 '라라', '루루', '미미', '세라', '밤비나' 등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종이인형들이 별빛 담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제발 나를 데려가 주세요.'


조심조심 집으로 모셔온 후에도 나는 한동안 인형들에 손대지 않았다. 가위질 전까진 솜사탕 같은 드레스와 구슬 달린 구두는 아직 '라라'나 '밤비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수영복 차림에 얌전히 손을 모으고 있거나 뒷짐을 지고 있을 뿐이었다.


가위 날은 조심조심 전진해야 했다. 레이스 하나라도 망가뜨려선 안 됐다. 경계선 따라가는 데 몰두한 나머지 드레스의 어깨걸이를 자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아무리 예쁜 옷이라도 어깨걸이가 없으면 인형에게 입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언니나 엄마에게 부탁하긴 싫었다. 오직 문방구에 다녀오는 수고로움과 모처럼 받은 용돈을 기꺼이 바친 나만이 그녀들에게 가위를 댈 자격이 있었다. 적당한 긴장감과 집중력이 생길 때까지 나는 참고 기다렸다. '밤비나'들도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동생의 딱지를 뜯는 것은 쉬웠다. 딱지 한 판에는 보통 50개에서 70개 정도의 동그란 딱지가 달려있었다. 칼 선이 그어져 있어 거침없이 뜯어내기만 하면 됐다. 딱지에 별이 많은 쪽을 맞추거나, 새끼손가락으로 튕겨 멀리 날리거나, 지놀이는 다양했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결국 누가 더 딱지를 많이 따느냐였다.


종이인형 놀이는 딱 한 가지였다. 역할놀이. 상황은 매번 달랐지만 에피소드는 비슷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잠깐, 나 옷 좀 갈아입고 올게'하고 옷장으로 가는 것이다. 일단 옷장으로 가면 새 옷을 모두 입어봐야 했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끈 나머지 나중에는 스토리와 전혀 상관없는 옷을 입고 나와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다. 소풍을 가기로 해놓고 잠옷을 입고 나와 '아, 잘 잤다'하는 식이었다.    


동생과 나는 부자라는 점 외에도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다. 공동의 적을 가진 것이다. 바로 할머니였다. 할머니에게는 우리의 보물이 집을 어지럽히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어이구, 둘 다 철 좀 들어라, 철 좀! 학생이 공부를 해야지.”


할머니는 거듭 경고했다. 할머니의 경고 뒤에는 반드시 행동이 따랐다. 틀림없이 딱지와 종이 인형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쓰레기통에 처박 운명이었다.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될 순 없었다.


둘 다 알거지가 될 경우 동생보다는 내 쪽이 훨씬 더 치명적이었다. 동생은 딱지 몇 장을 들고 동네를 한 바퀴 쓸고 오면 다시 부자가 될 수 있지만, 나는 한 푼 두 푼 모아 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눈을 피해 보물 숨길 장소를 호시탐탐 살폈다. 손길이 자주 닿는 곳이나 책상 근처에 두는 것은 자살 행위나 같았다. 장롱 속은 구겨질 염려가 있었다. 집 안팎을 두루두루 살핀 끝에 낙점한 곳은 다락방이었다.    


다락방은 안방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 작은 문을 열면 그 안에 안 쓰는 물건이 먼지에 덮여 있었다. 어른들도 여간하면 다락방에 오르지 않았다. 나 같은 어린애들은 가파른 계단을 오르다 주르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두꺼운 잡지를 일곱 권이나 나르는 일은 모험에 가까웠다. 하지만 해야 했다.  '라라'와 '밤비나'들은 애처롭게 나만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할머니가 마실 나간 사이 나는 '소년중앙'을 한 권씩 다락방으로 날랐다. 갈피마다 끼운 종이인형이 빠지지 않도록 책을 꽉 오므려야 했기 때문에 손가락 마디가 저렸다. 기다시피 계단을 오르느라 정강이와 무릎에도 멍이 들었다. 두세 권쯤 겨우 옮겼을 무렵 동생이 따라붙었다.


녀석은 커다란 딱지 포대를 질질 끌고 왔다.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던 녀석은 내가 다락방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이유를 단박에 알아챘던 것이다.


딱지 포대는 소년중앙보다 훨씬 무거워 녀석 혼자 힘으로 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결국 내가 도와야 했다. 하지만 내게도 '소년중앙'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딴 데로 가.”

  녀석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할머니한테 이를 거야."  


대체 그 작은 짱구 머리에 언제 그런 사악한 생각이 자리 잡게 된 것일까. 고자질은 녀석의 전매특허였다. 방법이 없었다. 녀석의 보물이 들키면 내 보물도 들킨다.


나는 낑낑대며 딱지 포대를 다락방으로 끌어올렸다. 녀석은 밑에서 포대를 밀어 올렸다. 할머니가 돌아올까 번갈아 망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물들이 모두 다락으로 옮겨졌을 땐 둘 다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됐다.  

 

그날 이후 동생과 나는 다시는 다락방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몰래 꺼내고 다시 들여놓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동생에게도 다락방 출입을 금지시켰다. 동생 것이 들키면 내 것도 위험했으니까. 동생 역시 마찬가지 입장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견제하며 은밀하게 보물창고를 공유했다. 대신, 다른 놀이로 관심사를 옮겼다. 고무줄놀이, 다방구, 땅따먹기, 놀이는 얼마든지 많았다.


보물 까맣게 잊히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만 필요했다. 나도 동생도 다락방 계단을 오르지 않았지만 그건 보물과 아무 상관없었다.  식구들 중 다락방에 볼 일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물은 안전하게 보존됐다. 더 이상 우리에게 보물이 아니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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