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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경 Mar 25. 2021

일체 문구점

사물이 있던 자리⑫ 학교 앞 문방구

'일체 문구점'이 그 문방구의 본래 이름은 아니었다. 푸른 비닐 차양에 검은색 페인트로 '문방구 일체 문구점'이라 쓰였는데 '문방구' 앞에 빨간 돼지저금통과 훌라후프를 걸어놓는 바람에 '일체 문구점'만 보였다. '일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뭐든 일체 문구점으로 사러 갔다.


일체 문구점을 찾기 위해 굳이 간판 같은 건 볼 필요도 없었다. 출입구 옆에는 난쟁이 전자오락기 세대가 나란히 놓여있고, 딱지며 쫀드기, 사탕, 검은 고무줄, 플라스틱 물총, 방울 머리핀, 같은 것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마치 문방구 안이 너무 좁아 피난 나온 것처럼. 그것들은 출입구 옆에 바글바글 모여 있다 나 같은 꼬맹이들을 낚아챘다.


문방구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찬란하게 빛났다. 가판대 위에 누워있는 왕자표 크레파스와 요술 천사 꽃분이 종합장, 스케치북에 그려진 무수한 별과 하이라이트가 무지갯빛을 쏟아냈다. 색색의 구슬과 공깃돌이 가득 찬 유리 항아리 두 개 눈부실 지경이었다. 책장과 천장 사이에는 조립식 장난감 박스가 빈틈없이 박힌 채 아우성치고 있었다.


정말, 우리가 찾는 건 그곳에 다 있었다.   

  

일체 문구점이 가장 바쁠 때는 등교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모양 자 찾는 날엔 모두 모양 자만 찾았고, 색종이와 풀을 찾는 날에는 또 그것만 찾았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미리 내다 놓으면 좋으련만, 주인아저씨는 항상 허둥댔다. 교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지면 아이들은 한꺼번에 아저씨에게 동전을 내밀고 물건을 집어갔다. 동전이 바닥에 떨어져도 아저씨는 그저 손만 벌리고 서 있었다. 한차례 아이들이 휩쓸고 간 다음에야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느릿느릿 주웠다.


아저씨는 노총각이었다. 언제 봐도 검은 민소매에 후줄근한 건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겨울에도 민소매 위에 군인들이 입는 얼룩 점퍼를 하나 걸칠 뿐이었다. 뒷주머니엔 항상 쌍절곤이 꽂혀 있었다. 손님이 뜸한 시간엔 문방구 밖으로 나와 날랜 솜씨로 쌍절곤을 휘둘렀다. 그럴  제법 활기차 보이기도 했다.


엄마는 문방구 아저씨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전자오락기에 들러붙어 알록달록한 불량식품을 쪽쪽 빨아대는 꼬맹이들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가끔 애를 잡으러 온 아줌마들이 아저씨에게 잔소리하기도 했다. 코 묻은 돈을 빼가려고 별 걸 다 갖다 놓는다면서. 아저씨는 뒷주머니에 쌍절곤을 축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쩔쩔매곤 했다.


"너도 학교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 자꾸 거기서 얼쩡거리면 혼날 줄 알아!"

"…."

엄마는 내가 전자오락을 하거나 불량식품을 먹으려고 문방구에 들락거리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몰랐다. 거긴 진짜 별의별 게 다 있었다. 얼마 전 공책을 사러 갔을 때 알게 됐다.   


방구엔 아무도 없었다. 어디서 쌍절곤을 정신없이 돌리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아저씨는 오지 않았다.


"아저씨~! 아저씨이~! “

안쪽을 향해 목을 빼고 소리 질렀다. 빨리 공책을 사서 숙제를 해야 했다.  

"잠깐만, 잠깐만."

아저씨는 문방구 깊숙한 곳에서 쪽문을 열고 나왔다. 안채로 통하는 문이었다. 문틈으로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따라 들어왔다. 새털처럼 보드라운 털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야, 고양이다! 아저씨가 키우는 거예요?"

"아니, 도둑고양이야."

"그런데 왜 여기서 키워요?"

"어… 그렇게 됐어. 들어와서 구경할래? “

아저씨가 쪽문을 살짝 어줬다.

마당으로 이어진 통로 한쪽엔 연탄창고가 있었다. 그 안에 고물고물 새끼 고양이가 여섯 마리나 있었다. 얼마 전 어미 고양이가 숨어들어 새끼를 낳았다고 했다. 아저씨는 종이박스 안에 담요를 깔아 고양이 집을 만들어줬다.


"비밀이다. 아이들이 몰려들면 고양이들이 싫어할 거야."

아저씨는 아이들이 아니라 아줌마들이 도둑고양이들을 쫓아낼까 겁을 내는 것 같았다.  


나는 방과 후엔 연탄 창고에서 살다시피 했다. 엄마에게 혼난 날에도 고양이를 보러 갔다. 동생과 싸워도, 언니와 싸워도 나만 혼나는 게 억울했다. 고양이 털을 쓰다듬고 있으면 울적한 기분이 씻겨나갔다.


"아니, 애를 어떻게 꼬드겼기에 날이면 날마다 여길 오는 거예요!"

한창 어미 고양이에게 쫀드기를 먹이고 있는데 밖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오…, 실은…."

아저씨 목소리 들렸다.

나는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잔뜩 움츠러들었다. 도망칠 곳도 없었다.  도둑고양이와 같이 있는 걸 알면 혼쭐이 날 것이다.  엄마는 도둑고양이들이 쓰레기통을 뒤진다고 질색했다.

 

지금이라도 나갈까? 아냐. 아저씨가 쪽문을 열어줄 리 없다.  고양이들을 지켜야 하니까.  매일 매일 용맹하게도 쌍절곤을 돌리지 않나.


아저씨를 믿은 게 잘못이었다. 잠시 후 쪽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가 들이닥쳤다. 난 독 안에 든 쥐였다.


"아니…, 여기 고양이가 있었어?"

뜻밖에 엄마 목소리에 화색이 돌았다.

"총각, 나 고양이 한 마리만 줘. 요즘 집에 쥐가 들끓어서 말이야.”

“글쎄요….”

아저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미 고양이를 바라봤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엄마에겐 허락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어미젖을 빨고 있는 새끼 한 마리를 냉큼 집어냈다.


새끼 고양이를 안고 집으로 오는 길에 나는 엄마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엄마는 도둑고양이 싫어하잖아.”

어미 고양이에게서 새끼를 훔쳐낸 기분이 들었다.

"얘는 집에서 났으니 집고양이야.”

마침 새끼 고양이가 힘없이 울었다. 엄마가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


“그나저나, 거긴 도둑고양이든, 집 고양이든, 정말 일체 없는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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