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회색빛이었다.
아침 9시, 알람 소리 대신 핸드폰 알림음이 잠을 깨웠다.
‘배달의민족’에서 보낸 할인 쿠폰 문자였다.
주말 아침부터 나를 유혹하는 건 역시 자본주의의 맛이랄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낡은 패딩 점퍼를 걸친 채 베란다 문을 열었다.
훅 끼쳐오는 차가운 공기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온통 앙상한 나뭇가지들뿐. 겨울이었다.
꽃도, 파릇한 풀도 없었다. 모든 것이 멈춰 선 듯 보였다.
요즘 내 인생이 딱 그랬다. 멈춰 선 듯, 아무것도 없는 겨울.
취업 준비는 끝없이 미끄러지고, 친구들은 하나둘씩 취뽀 소식을 알렸다.
어제도 채용 공고를 보다가 한숨만 푹 쉬었다. ‘어학 성적 없음’, ‘자격증 없음’.
이력서 빈칸을 볼 때마다 한숨만 늘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요즘, 내 시간은 그저 흘러가고만 있는 것 같았다.
겨울처럼, 아무런 생명력도 없는 시간.
"야, 너 또 그 표정이다."
혜림이가 젓가락으로 내 이마를 콕 찔렀다. 점심시간, 학교 식당에서 파스타를 먹던 중이었다.
내 얼굴에 '나는 지금 망했다'라고 쓰여있었나 보다.
"아니, 다들 잘만 나가는데 나만 제자리걸음 하는 것 같아서."
혜림이는 내 말을 듣더니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야, 너 설마 그거 다 믿냐? 인스타 피드? 다 최종 합격만 올리지, 서류 탈락하고 면접에서 미끄러진 건 왜 안 올리겠냐. 그리고 솔직히, 지금 당장 뭘 대단한 걸 해야만 하는 줄 알아? 스물다섯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인생 다 산 것처럼 굴지 마라."
혜림이의 시니컬한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나는 늘 남들과 나를 비교하며 나 자신을 갉아먹었다. 졸업 전시회 때도 그랬다.
몇 달 밤샘 작업으로 완성한 내 작품 앞에서 나는 얼어붙었다.
마음처럼 그어지지 않은 선들, 어딘가 어설픈 색감. 완벽주의라는 가면을 쓴 채 나는 결국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
남들의 '완벽한 결과물'에 나를 맞추려다 늘 포기하고 만 일중의 하나였다.
그날 저녁, 혜림이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걷는데, 혜림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 당장 뭘 대단한 걸 해야만 하는 줄 알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좇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당장 돈이 안 되는 일, 당장 스펙이 안 되는 일은 의미 없다고 치부해 버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문득, 어릴 적 아빠와 함께 텃밭에 씨앗을 심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 여기 아무것도 없는데 뭘 심어요?"
아빠는 내 손에 작은 씨앗 하나를 쥐여주셨다. 흙색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볼품없는 씨앗이었다.
나는 아빠가 알려주시는 대로 흙을 파고 씨앗을 넣고 흙을 덮었다. 물을 줬다.
그리고 며칠 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또 며칠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빠, 왜 아무것도 안 나와요?"
투덜거리는 나를 보며 아빠는 웃으셨다.
"민지야,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이지? 그래도 이 씨앗은 흙 속에서 혼자 자라고 있는 거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거지. 언젠가 때가 되면 파릇파릇한 싹을 틔울 거야."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씨앗이 마법처럼 뿅 하고 나타나는 줄 알았다.
집에 도착해 조용히 방에 앉았다. 창밖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방 한구석에 세워져 있던 캔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졸업 전시회 때 출품하지 못한 그 그림이었다.
먼지가 뿌옇게 앉은 캔버스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다시 붓을 들었다.
삐뚤빼뚤한 선을 다시 그어보고, 어설픈 색감 위에 새로운 색을 덧입혔다.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은 버렸다. 그냥, 그리고 싶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당장 결과가 없어도 괜찮다. 이 작은 노력들이,
이 사소한 시간들이 언젠가는 파릇파릇한 싹을 울 수도 있지 않을까?
겨울의 땅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라는 씨앗처럼 말이다.
그날부터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툰 붓질이 이어지고, 물감 냄새가 방안에 은은하게 퍼졌다.
겨울이다. 꽃도, 파릇한 풀도 없다.
그러나 씨앗은 아무도 모르게 자라고 있다.
나 역시 지금은 겨울의 땅속에 묻힌 씨앗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봄이 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싹을 틔울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