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도

by 이로

나는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정확히는 침대가 나를 집어삼켰다고 해야 맞을 거다.

푹신한 매트리스는 어제의 피곤함을 고스란히 빨아들인 스펀지 같았다.

폰을 집어 들었다.

인스타그램 릴스는 오늘도 어김없이 남의 인생 자랑 파티. 누구는 해외여행 가서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경으로 웃고, 누구는 명품백 언박싱 영상을 올린다.

나는? 나는 그냥 이불속에서 뒹굴거리는 스물여섯 백수.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잠은 왜 이렇게 많은지. 아, 백수라서 잠이 많은 건가.

어제 밤늦게까지 넷플릭스를 달린 탓에 눈은 뻑뻑하고 입안은 텁텁했다.

그래도 어쩌겠어, 이게 내 유일한 낙인데.


문득 며칠 전 친구들과의 식사자리가 떠올랐다. 밥 먹고 카페로 옮겨 나누던 시답잖은 대화들.

"야, 너 만약 다시 태어나면 뭐로 태어날래?" 승우가 뜬금없이 물었다.

다들 키득거리며 "나는 빌딩 부자!", "나는 아이돌!",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어!" 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그냥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뭘로 태어나고 싶냐니. 지금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다음 생까지 고민해야 하나.

그때 민지가 툭 던졌다.

"나는 그냥 빗방울이 될래."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민지를 쳐다봤다.

"아니, 왜 하필 빗방울? 비 오는 날 센티해서 그래?" 재영이가 놀려댔지만, 민지는 진지했다.

"그냥, 떨어지면서 다 씻어내고 싶어. 깨끗하게.

그리고 다시 땅으로 스며들어서 풀도 키우고, 꽃도 피우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거잖아."

민지의 말은 꽤 신선했다. 우리는 그저 돈, 명예, 성공 같은 인간적인 욕망에 갇혀 있었는데, 민지는 자연을 얘기했다.

빗방울이라니. 조금 엉뚱하지만, 듣고 보니 꽤 근사했다.

물방울이 되어 자유롭게 떠다니다가, 떨어져서 생명을 키우는 역할. 나쁘지 않네.


그날 이후로 나는 종종 그 질문을 떠올렸다.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을까.

딱히 되고 싶은 건 없었지만, 민지 덕분에 자연이 주는 위로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면, 유튜브에서 빗소리를 찾아 듣곤 했다.

투둑, 투두둑. 빗방울이 아스팔트에 부딪히는 소리, 흙에 스며드는 소리.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졌다.

요즘 나는 작은 풀잎을 키우는 중이다.

창가에 놓인 화분 속 바질은 매일 아침 햇살을 받아 무럭무럭 자란다.

조그맣던 씨앗이 싹을 우고, 연약한 줄기가 뻗어 나가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만 하다.

내가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그저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는 것만으로도 알아서 자란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너무 많은 것을 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가는 것.

문득 바질 잎에서 상큼하고 청량한 향이 났다.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보니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어떤 모습으로든, 이렇게 온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

그래,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그냥 풀잎이 되고 싶다.

바람에 흔들리고, 햇살을 받고, 빗방울을 맞으며 그저 존재하는 풀잎.

복잡한 생각 없이, 그저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

누군가의 곁에서 푸른 빛깔로 존재하며, 소박하게나마 위로를 주는 그런 존재.


침대에서 벗어나 창밖을 내다봤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빗방울이 땅을 적시고, 그 빗물은 풀잎을 키울 것이다.

그리고 그 풀잎은 다시 햇살을 받아 푸르게 빛나겠지.

다음에 다시 만난다면, 우리는 빗방울이 되어 혹은 풀잎이 되어,

아니면 작은 돌멩이가 되어서라도 서로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아니, 이미 우리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서로를 스쳐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마시는 물 한 모금이 어쩌면 민지였을 수도 있고,

내가 밟고 있는 이 흙이 어쩌면 승우였을 수도 있지 않나.


어쩌면 우리는 이미 서로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자연 속에서, 이름 모를 풀잎 하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에도 우리는 이미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답은 늘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있는지도 모른다.

빗방울이 되어라. 풀잎이 되어라. 꽃이 되어라. 흙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 파도가 되어라.

그 무엇이라도 좋다. 자연의 일부분만 된다면, 다시 우리가 만날 때, 우리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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