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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전화는 여전히 날카롭다.

by 정희승

플레이리스트 재생 버튼을 누르고 출근길에 나서는 아침.

이 시간만큼은 정말 행복하다.


아들 매니저도, 살림하는 엄마도 아닌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

나는 음악과 함께하는 출퇴근 시간을 꽤 좋아한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의 간지러움도 좋다.


일중독이던 그 시절, 바쁘게 달리던 예전의 나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비록 무급의 단순 노무지만 흐뭇해하는 남편의 미소를 보면 월급보다도 더 보람되고 뿌듯하다.


가슴이 뛰는 사랑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이제는 진한 육수처럼 깊게 우러난 부부애가 좋을 나이다.


기댈 언덕 없이 자란 우리가 서로를 의지하며 여기까지 살아온 시간.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잘 해낸 것이다.



음악을 멈추게 하는 전화는 대부분 정해져 있다.

남편 아니면 엄마다.


남편의 전화는 대부분 무언가를 부탁하는 용도다.

두고 온 서류, 놓고 온 물건.

그럴 때 남편은 상냥하게 부탁하고 나는 그저 가져다주면 된다.


그럼 고맙다는 의미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 내 책상 위에 물방울을 머금은 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엄마의 전화는 좀 다르다.


딸의 안부가 궁금해서일 테지만 그 표현 방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바쁘냐?” 혹은 “손가락이 부러졌냐?” 사랑의 표현은 여전히 시비조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해지지 않는 말투.

감성을 흐트러뜨리고 음악을 멈추게 만든다.

멀쩡하던 속이 답답해진다.



“어디냐, 회사냐?”

운전 중이라 대답하면, 엄마는 또 무심한 말들로 일상을 읊조린다.



엄마의 하루는 늘 같다.

아침밥을 하고, 먹고, 치우고 청소기를 오전 한 번, 오후 한 번 돌린다.


어제 입은 아빠의 하얀 속옷과 자신의 속옷은 빨랫비누로 손빨래하고 찌그러진 양푼에 담아 삶는다.


비눗물이 남은 화장실은 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뽀송하게 닦아낸다.

아침에 쓴 수건으로 세면대, 거울을 닦고 걸레로 바닥까지 말끔하게 닦아내는 엄마.


샤워 후 머리카락, 물기가 남으면 욕바가지 듣던 교육 덕분에 우리 집 화장실 하수구는 머리카락 없는 깨끗함을 유지하고 있다.


베란다 분리수거까지 마치면 엄마는 소파 대신 바닥에 앉아 아침 드라마를 시간표대로 챙겨 본다.


점심시간이 되면 아빠와 둘이 먹는 식사를 준비한다.

국과 반찬은 비슷하지만 생선이나 고기는 굽거나 조리거나 맛을 달리해 늘 다르게 낸다.


엄마의 손맛은 목포 출신답게 어떤 요리든 척척 맛깔난다.

같은 반찬을 일주일 내내 먹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다.


밥하고, 청소하고, 티브이 보고.

엄마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 패턴은 내가 20대일 때부터였으니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엄마, 지루하지 않아? 복지관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고 그래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난 다 귀찮아. 티브이가 내 친구야.”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친구도, 바깥활동도 필요 없다.

혼자가 편하단다.

하루의 시간표는 티브이 프로그램으로 채워져 있고 전화나 방문도 크게 반갑진 않다.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남은 시간에야 자식에게 전화를 건다.


주로 아빠와 싸운 날.

아니면, 문득 자식이 생각났을 때.


아빠와 다툰 다음 날이면 엄마의 말투는 한층 더 날카롭다.


“자식 키워봤자 뒷방 늙은이 취급이나 받지...”

그 말이 들리면 전날 아빠와 싸웠다는 뜻이다.


심부름 한번 시킨 적 없는 두 아들에게 시시콜콜 속 얘기하는 건 해본 적도 없지만 재미없다.


상냥하게 받아주는 딸이 편하다.


‘우리 집 머슴이자 도우미’ 같은 딸.


엄마는 그 익숙한 관계에 오늘도 무심히 기대고 있다.



평생 받아줄 거라 믿었던 딸도 어느새 중년이 되었다.


나도 이제 갱년기를 겪고 있다.

화로처럼 뜨거운 발바닥, 땀이 줄줄 흐르는 정수리, 등까지 달아오르는 이 더위.


육체의 온도가 오르면 가슴의 온도도 덩달아 올라간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날카로운 말투가 점점 더 힘들게 다가온다.



“엄마, 좀 부드럽게 말하면 안 돼?”


나는 방패를 꺼내 들었고 그건 결국 엄마의 화살을 자극하는 꼴이 되었다.


“내 말투가 어때서?”
“그래. 너 잘났다. 어디서 엄마를 가르치려 들어?”
“내 팔자에 고운 말이 나오겠냐?”


한 마디를 건네면 백 마디의 신세타령이 돌아온다.

전화는 그렇게, 엄마의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종료된다.


이렇게 하루의 음악은 엄마의 말 한마디에 잠시 멈춘다.

그리고 나는 다시 플레이리스트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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