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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태성 Nov 11. 2024

11일. 다단계

지금까지 퇴사를 여러 번 했지만 대책을 세우고 퇴사한 적은 없다. 이번 퇴사 또한 퇴사하고 나서 계약 기간이 끝날 때까지 글을 쓰겠다는 계획 말곤 세운 게 없다. 그렇다고 해서 지갑이 내게 여유를 주는 건 아니다. 대책이 없다면 없는 만큼 겪어야 한다.

첫 직장을 퇴사하고 나서 얼마간 굉장히 궁핍했다. 직장을 새로 구하기엔 용기가 나지 않았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블로그를 열심히 했다. 그때 누군가 댓글을 남겼다. 편하게 소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며 내게 다가왔다.

원래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댓글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답글을 달았다. 상대방은 곧바로 답을 줬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럴싸한 방식이라 상대방과 연락을 계속했다. 카카오톡 아이디를 주고받고 줌으로 연락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대뜸 내게 제품을 사서 써보라고 했다. 나는 그대로 했다. 화장품이 없기도 했고 설명만 들었을 땐 좋은 제품이라고 여겼으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나는 거지였다. 그런데도 삼만 원짜리 화장품을 샀다.

그러고 나서 그 사람은 계속해서 내게 연락했다. 자기가 하는 사업이 있는데 자기랑 비슷하게 하면 된다고 했다. 내게 서울로 와서 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나는 행사에 갔다.

그때까지 나를 이끈 생각은 하나다. “뭐, 그렇게 나쁘진 않네. 설마 죽기야 하겠어?”

호승심.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일까. 그렇게 다단계에 발을 담갔다. 발가락을 담갔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행사를 참석하고 나서 곧장 더는 하지 않겠다고 답했으니까.


다단계 화장품을 홍보하는 행사는 굉장히 규모가 컸다. 도무지 다단계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어째서 사람들이 다단계에 빠지는지도 알 수 있었다. 다단계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냥 ‘사업’이라는 느낌만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다단계라고 인식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다단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놀랍게도 ‘다단계’는 사기를 뜻하진 않는다. 다단계는 구조를 뜻하는 말이다. 다단계 사업이나 다단계 사기나 비슷하지만 다르다. 내가 겪은 건 다단계 사업이었다. 그 길로 갔더라면 어쩌면 나는 많은 수입을 올렸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수입의 일부, 어쩌면 전부는 날 끌어들인 사람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입을 얻고자 한다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니까, 그게 다단계다.     


하다 못해 다단계에 당했다는 생각이 수치스러워 소주 한 잔만 마셔도 취하는 내가 편의점에서 보드카를 한 병 샀다. 안주는 하리보 젤리. 술맛이 너무 세서 안주는 있으나마나였다. 그러고 나서 고주망태 취했다.

팔에 피가 통하지 않으면 팔에 감각이 사라지듯 온몸에 감각이 사라졌다. 처음으로 만취한 내 상태가 그랬다. ‘나’라는 의식은 있으나 몸을 느낄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인다고 하면 뭔가 묵직한 살덩어리가 따라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바닥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에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차마 집밖으로 나갈 순 없으나 뭐라도 먹어야 해서 난생처음 배달 음식을 시켰다. 해장국을 시켰다. 해장국은 그냥 해장국이었다. 더 맛있거나 맛없지 않았다.

얼마 후에 취기가 가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취를 겪고 나니 다신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단계는 나에게 만취를 안겨줬다. 만취하지 않았더라면 더 심한 꼴을 봤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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