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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축복을 냉장고에

by Merry Christmas

내가 효진 씨를 다시 본 것은 그녀가 분만실로 내려간 날로부터 5일이 지난 후였다.

그녀는 퇴원하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를 만나러 왔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산모의 입원기간은 자연분만 2박 3일, 제왕절개 6박 7일이다. 그러니까 자연분만인 효진 씨가 4일 만에 퇴원하게 된 것은 일반적이지 않은 어떤 일이 그녀에게 있었다는 뜻이다.


효진 씨가 출산하면서 겪은 불운은 비단 아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온 불운은 듀럴 펑쳐(dural puncture)였다.

듀럴 펑쳐란 무통주사를 맞을 때, 주사 바늘이 필요 이상으로 깊게 들어가 척수를 감싼 경막을 뚫는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 뚫린 경막으로 뇌척수액이 새는 증상이 발생한다. 뇌의 완충 역할과 뇌압을 조절하는 뇌척수액이 경막으로 새어 나오면 극심한 두통이 온다고 한다.


효진 씨는 출산 후 저녁부터 두통에 시달렸는데, 처음에는 너무 울어서 머리가 아픈 줄 알았다고 했다.

실제로 누워 있을 때는 그다지 아프지 않았고, 앉거나 일어서면 일반적이지 않은 두통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군가 뇌를 손으로 으스러뜨리는 듯한 끔찍한 두통-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것이 뇌척수액이 새서 생기는 고통이란 것을 의료인도 아닌 효진 씨가 알 리 없었다. 조기진통을 몇 달이나 참은 인내의 달인답게, 효진 씨는 극심한 두통을 참으며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의 면회를 가기 위해 걸어가다가 결국 혼절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료진이 그녀에게 '듀럴 펑쳐'가 일어난 사실을 알았고, 효진 씨 본인의 피를 뽑아서 경막을 막는 시술(Epidural Blood Patch)을 시행했다고 한다.


지나간 일이나 몇 마디 말로 나오는 것일 뿐. 이 일련의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효진 씨의 마음고생은 얼마나 심했겠는가.


615호에 남겨진 우리도 애간장이 다 녹았다는 표현 밖에 더 할 말이 없다. 효진 씨가 없는 5일 동안, 그녀가 있던 4번 자리에는 하혈로 입원한 임산부가 2박 3일을 머물다가 갔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그 모든 고난을 헤쳐내고 효진 씨는 언제나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615호에 나타난 것이다.


"나 없다고 너무 조용한 거 아니야?"


청바지에 트위드재킷을 입고 화사하게 화장한 그녀에게서는 그간의 고초나 그늘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4번 동생? 원래 이렇게 예뻤어?"

"내가 원래 지금보다 쫌 더 예뻐요~!"


텐션이 살아있었다.

효진 씨가 견딘 모든 고통의 목적인 그녀의 아기 - 요미도 함께 퇴원하기 때문이었다.


요미의 뇌에 일어난 출혈은 다행히 뇌실로 확장되지 않았다. 뇌출혈 1기에 해당했고, 추적관찰은 해야 하지만 대부분은 빠른 시일 안에 흡수되어 발달에도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다. 인큐베이터에 들어간 지 이틀 만에 자가호흡에도 성공했고 이제 엄마와 함께 퇴원을 한다.


분만을 결정한 의사도

분만을 거부한 효진 씨도

모두 옳은 선택을 했고

그 모든 것을 2.7kg 그 작은 아기가 잘 버텨주어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주었다.

그리고 효진 씨는 우리에게 또 다른 것을 주었다.


"빰빠라밤~! 내 마지막 택배 배달이야!"


20kg 여행가방 한가득 담아 들고 온 것은 퇴원을 위한 소지품이 아니었다.

전부 먹거리였다.


대략 20kg의 식량이 텅텅 빈 615호 냉장고를 채우기 시작했다.


냉동실에는 저당 아이스크림과 치즈케이크가,

냉장실에는 프로틴 초코바와 브라우니, 요구르트, 견과류, 사과, 멸균우유, 구운 계란, 쾌변두유, 푸룬주스까지, 문이 겨우 닫힐 정도로 가득가득했다.


"내 사랑과 축복을 냉장고에 넣어둔다~!"


효진 씨는 두 손을 흔들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병원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사를 고하는 효진 씨의 뒷모습을 보며 배식하러 오신 여사님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예인이여. 연예인."


그녀의 퇴원과 함께 나는 615호 최고 고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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