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일. 아침이 밝았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전화를 켜고 임신어플을 열었다.
D-84
오늘 블루베리는 28주 0일이에요!
[우리 아기는 이만큼 성장하고 있어요]
크기:36cm~40cm 몸무게 1000g ~1400g
[이 시기의 아기는-]
*청각이 거의 완성됩니다~!
이 시기의 아기는 엄마의 목소리, 심장이나 폐에서 나는 소리뿐 아니라,
엄마의 주변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 임신 28주 이후에 체중이 1,000g을 넘은 아기는 NICU라는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서 의학적으로 관리를 받았을 때 생존할 수 있는 비율이 95% 이상입니다.
[이 시기의 엄마는-]
*자궁이 커지면 위나 장을 압박하여
속 쓰림, 더부룩함, 메스꺼움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요.
*배가 당기는 '전구 진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배가 많이 당길 때는 누워서 휴식을 취해 보세요.
28주. 마침내 태아의 최소 생존주수에 도달했다.
아제 블루베리는... 살았다.
오늘은 마침 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진료실에 들어서는 나를 향해 박순제 선생님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해요. 1차 목표 도달했네. 이젠 걱정 없어. 28주면 다 온 거야."
박순제선생님의 얼굴에도 나만큼이나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화면에는, 수술 직전에 촬영된 초음파 사진이 보였다. 경부 밖으로 블루베리의 발이 나와 있는 사진이었다.
"여기 발 나온 거 보라고. 이런 아기를 살려냈잖아. 발 나온 케이스 중에 가장 성공적이야. 엄마는 어딜 가더라도 자랑할 만 해. 그렇고 말고."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살면서 이 말을 이토록 진심으로 내뱉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소소하지만 견과류와 두유를 드렸다. 나갈 수도 없이 병실에서만 있다 보니 내가 가진 것이 그런 것 밖에 없었다. 다행히 박순제 선생님께서는 고맙다며 받아주셨다.
선생님과 함께 '2차 목표 30주에 도전!!!'을 외치며 기분 좋게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남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진료 봤어요? 뭐래요?]
남편도 오늘이 28주에 도달한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진료실에서 무사 확인을 받을 때까지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러면 내가 안심시켜 주는 수밖에.
[빰빠라밤~! 1차 목표 도달입니다~!!]
메시지 옆의 '1'이 없어짐과 동시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이제 블루베리는 살았네요..."
목이 메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다 자기 덕분이에요. 고생했어요 정말..."
"나는 뭐 그냥 가만히 누워있었는데요. 병원에서 해 준거지요. 심지어 아직 갈 길도 멀었어요. 38주 넘어서 낳을 거거든요."
사실 나도 고생했지만 좀 겸손을 떨어보았다.
"괜찮아요. 살아만 있으면 난 괜찮아요. 병원에서 누워 있는 게 얼마나 힘든데, 그것도 자기같이 활발한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내가 짐작도 못하겠네요. 이제까지 아림이 키운 것도 그렇고... 자기 정말 고생했어요."
남편이 육아를 해보니 나의 고충을 알게 된 걸까? 갑자기 아림이 이야기는 왜 하는 걸까? 엄마의 촉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아림이 무슨 일 있어요?"
"일은 아니고... 자기 신경 쓸까 봐 말을 안 했는데, 요새 고집이 늘었는지 떼쓰는 게 너무 심하네요."
... 떼는 원래 심했했지만... 엄마 한정이었는데 아빠에게로 확장된 모양이었다. 아이가 떼쓴다는 한마디에, 정말로 아림이의 주 양육자가 바뀌고 있는 것이 실감 났다.
"아림이가... 하... 머리를 안 감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감겨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기욕조에 눕혀서 머리 뒤로 젖히고 살살 감겨주면 되는데, 전에 알려주지 않았어요?"
입원한 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 여태 애 머리도 못 감기고 있단 말인가?
"맞아요. 전에 자기가 알려줬는데, 그 방법대로 하다가 눈에 샴푸가 몇 번 들어갔는데, 그 후로 머리를 절대 안 감으려고 해요."
"아기 욕조에 눕혀 놓고 머리 감는데 샴푸가 눈에 왜 들어가요?"
".. 하여튼...!. 어제는 놀이터에 갔는데,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모래판에 누워서 뒹굴어가지고 머리에 모래가 다 묻었는데, 집에 가면 아이스크림 준다고 하고 데려왔어요. 오자마자 씻기려고 하는데, 목욕 안 하겠다고 목욕탕 앞에 드러누워서 절대 안 일어나는 거예요.
며칠 전에는 샴푸캡도 사 봤는데 그것도 안 쓰려고 하고, 서서 앞으로 숙이는 것도 안되고..."
남편의 목소리에서 난감함이 여실히 묻어났다.
"참내네요. 그럼 머리 감자고 하지 말고, 큰 욕조에 물 가득 받아서 물놀이하자고 해봐요. 오빠랑 같이 들어가서 물놀이하다가 '둥둥 놀이하자~!'라고 하면서 배영 자세로 뒤로 눕힌다음 물 안에서 얼른 감겨 버려요."
"오...! 알겠어요. 시도해 볼게요. 그리고..."
"예, 예, 무엇이든 물어보십셔~."
"밤에도 잠을 안 자요. 자장가 불러줘도 안 자고, 백색소음 틀어줘도 안 자고, 책 잃어줘도 안 자요."
"... 자장가며 책이며 재밌는데 자겠나요. 그냥 자자~ 하면서 불 다 끄고 눈 감고 자는 척하면 자기도 눈감고 자는 거 따라 하다가 자요."
"... 하아... 자기 말만 들으면 정말 쉬운 거 같은데. 난 왜 안되죠?"
"만 2년을 넘게 연구해보십셔~. 어이쿠 밥 들어오네요. 통화 종료하겠습니다~!"
남편은 익숙지 않은 육아에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안타까웠지만, 몇 마디 조언 외에는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 파이팅! 이 말만 해 줄 수밖에..!
병실 동지들과 간호사들, 김미영 여사님의 축하를 받으며 행복한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아중씨가 준 옷을 상자에서 꺼내보았다. 하얀 바탕에 엄지손톱만 한 초록색과 빨간색 공룡들이 귀여운 패턴으로 그려져 있었다. 살며시 배게 옆에 뉘어놓고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