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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May 13. 2024

화(Anger)

6. 그의 손에는 책이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남편과 나는 5년을 불꽃처럼 연애하고 결혼했다.

전시회 때 "오빠가 아빠 된다더라"라고 말했던 선배들의 장난스러운 예언처럼 그는 나의 남편, 두 아들의 아빠가 된 것이다.




졸업 후 그가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며 난 빨리 결혼하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랐다. 철없는 딸 시집보내기는 너무 이른 나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부모님은 많이 섭섭해하셨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약혼 먼저 하라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고 우리는 봄꽃이 만발하던 4월에 양가 친지들의 축하를 받으며 약혼했다.     


약혼 후 그는 회사원으로, 나는 디자인 학원 강사로 열심히 일하던 그해 겨울이었다.

빨리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나의 소원을 하느님이 들어주신 듯, 우리에게 덜컥 첫째 아이가 찾아왔다.

우리는 양가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서둘러 결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첫째를 품고, 우리가 다니던 성당에서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내 나이 스물다섯, 그의 나이 서른,  어린 신부였지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그의 아내가 되었다. 

두 아들이 성인이 되고 우리 결혼식 비디오를 함께 본 적이 있다. "저 때 둘이 아닌 셋이었다"라고 말하니 아들들이 적잖이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우리 가족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 결혼 후


시부모님은 무척 좋으신 분들이었지만, 갓 결혼한 며느리로서 챙겨야 할 대소사가 너무 많았다. 시댁에서 10분 거리에 신혼집을 차린 우리는 수시로 시댁을 방문해야 했다. 제사도 많았고 친인척분들의 왕래가 많은 종갓집이었다. 시댁은 아들만 셋을 두셨는데 남편이 셋째였다. 막내며느리여서 거들기만 하는데도 주방에서 음식 차리는 일이 너무 힘들어 화장실에서 몰래 운 적도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신혼을 보내며 첫째가 태어났다


첫째는 병치레가 잦았고 어른들은 너무 싸서 키운다고 걱정하셨다. 아이를 손에서 내려놓지 않고 거의 안아 키웠으니 유난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다행히 큰애는 돌이 지나며 잔병치레가 줄었고 첫째 육아에 온 정신을 빼앗겨 둘째 아이는 가질 엄두도 못 내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다시 선물처럼 둘째가 찾아왔다. '하나도 힘들었는데 둘을 어떻게 키우지?' 걱정했지만, 둘째는 첫째의 육아 경험이 있어 키우는 게 훨씬 수월했다. 그렇게 스물일곱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나에겐 믿음직한 남편이 있었고 우리의 사랑 안에서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커 주었다.

그런 우리에게도 결혼생활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 주말, 남편과 심하게 다투었다. 그즈음 나는 화가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남편은 회사 일로 또 모임으로 늘 바빴고 반복되는 늦은 귀가에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나도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워킹맘으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나와는 달리 자유로워 보이는 그에게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나 보다. 

     

집안일에 두 아들까지 챙기며 동동거리던 , 소파에서 쉬고 있는 그를 보며 화가 났다.

나는 개미였고 그는 베짱이 같았다.  나는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당신, 나 바쁜 거 안 보여~!!"      


나와 아이들은 뒷전인 것 같아 그에게 쌓여있던 불만이 폭발하고야 말았다.


이어지는 화에 그도 결국 욱하고 소리를 쳤다.

"집에서 마음 편히 쉬지도 못해!!

밖에서 일하다 보면 늦을 수도 있지, 그럼 회사 때려치울까?"


아이들이 있어 계속 큰 소리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현관문을 쾅! 닫으며 집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서운한 마음과 답답하고 억울한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얼마쯤 지났을까...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 그의 손에는 책이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을 나에게 건넸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뾰로통한 얼굴로 그가 내민 책을 받아 들었다.


틱낫한 스님이 쓰신 ‘화’ (anger)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싸우고 나서 '화'라는 책을 주니.. 그 책을 집어던질 만도 한데, 그때는 그가 주는 책을 순순히 받아 들었다.  더 이상 그와 싸움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고 그를 집 밖으로 다시 내보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쯤 우린 둘 다 평화를 원했다.


다음에는 이렇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펼친 '화 anger'는

"화 좀 안 내고 살 수 없을까?"라는 물음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스스로 반문하며 책을 읽어갈수록 '화'로부터 마음이 평온해지고 있었다.


화를 가라앉히고 그를 바라보니 그의 축 처진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만 오면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고 말하던 그였는데, 어느새 우리의 싸움으로 집을 전쟁터로 만들었다는 실감이 났다.

큰아들이 5살 때쯤, "엄마 아빠는 매일 싸워"라고 할머니에게 이르듯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린 서로 사이좋은 부부라고 자부했었는데, 아이 눈에 그렇게 비쳤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많이 미안했다. 싸운 게 아니고 크게 얘기한 거라고 수습해 보려 했지만, 유난히 기억력이 좋은 큰아들은 아주 어릴 때 일도 세세하게 기억하곤 했다.


읽던 책을 덮고 그에게로 갔다.

“자기야, 나 이제 화 안 났어...”

"나도 화내서 미안해. 앞으로 내가 더 잘할게."

"응.. 나도..."

이제야 편안해진 그의 얼굴을 보니 미안함과 행복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트가 너무 귀여워서, 화가 풀렸다.

그 후로도 우린 때때로 다퉜다. 싸움이 상처를 남길 때도 있었지만 서로를 위해 더 노력할 수 있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화해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서로에게 내미는 손을 잡아주었다.  언제 화났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내가 웃으면 그도 따라 웃었다.



“내가 당신을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면

그는 자기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정한 그의 말은 나의 불안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었다.


부족할 때도 넘칠 때도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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