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회사 단합대회 겸 골프 라운딩이 있는 날이었다. 좀 규모가 큰 행사였고 그 대회에는 경품이 걸려 있었다. 오피러스 자동차 경품이 걸려 있던 홀에서 그가 홀인원을 한 것이다.
살다 보니 그렇게 억세게 운이 좋은 날도 있었다. 경품은 현금화해서 나에게 반을 뚝 떼주고 나머지는 한턱내느라 기분 좋게 소진되었다. 한동안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홀인원 한 사람의 기운을 받는다며 그의 손을 잡았고, 그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기분 좋게 웃었다.
이후에도 그는 프로 골퍼들도 어렵다는 이글, 싸이클 버디를 해내며 즐겁게 골프를 이어갔다. 그런 날이면 골프 스코어 기록지를 자랑하듯 나에게 보여주었다. 우리 집에는 그가 받은 트로피며 상패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그는 초등학교 때 기계체조 했던 얘기를 가끔 들려주었다. 매일 빵을 준다는 선생님 말씀에 혹해서 시작했는데, 운동에 재능이 있었는지지역 대표로뽑혀 전국 소년체전에 나가 은메달도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운동 신경이 좋았고 공을 사용하는 모든 운동을 잘했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니던 때는 급식비를 내면 간식으로 빵을 나눠주었다. 먹는 애들보다 못 먹는 애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시댁은 형편이 괜찮았는데 '공짜'라는 말에 남편이 넘어간 것 같았다. 체조하다가 벌을 받을 때면 빵 창고에 가둬 놨다고 하는데, 그때 빵을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마음 아픈 얘기지만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나 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두 아들의 운동 신경이 날 닮은 것 같았다. 난 그와는 다르게 잘하는 운동도 없고 운동에는 취미가 없었다.
명절이면 온 가족이 편을 나눠 족구 경기를 했다. 우리 애들은 헛발질과 패스미스가 잦았고 구멍인 애들 쪽으로 공격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애들 팀이 지는 때가 많았다. 상대적으로 다른 형제들의 실력이 출중하기도 했다. 가족들은 막내(우리 남편)는 운동을 잘하는데 애들은 누굴 닮았냐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막내 안 닮고 제수씨 닮았나 보네~."
사촌들인 조카들도 "아휴, 삼촌(우리 남편)을 닮았어야지~"라고 말하며 아들들을 놀리곤 했다.
그날도 그는 새벽 골프를 나갔다. 화창한 토요일이었다.
그가 나가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을 잤다. 그리고 모처럼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한가로이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저녁은 뭘 먹을까', '내일은 어디로 놀러 가지?'를생각하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골프를 다녀온 그가 점심 먹은 게 소화가 안 된다며 얼굴을 찡그린 채 집으로 들어왔다.
"소화가 안 되는 것 같아, 가슴도 답답하고"
"너무 과식한 거 아니야? 좀 누워봐"
누워있는 그의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한쪽 배를 눌렀는데 그가 자지러지게 소리치며 아프다고 했다.
그 소리에 너무 놀라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그도 놀랐는지 누워있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뒤 안정을 찾은 그에게 빨리 병원에 가자며 일어섰다. 토요일이어서 응급실로 가야 했다.
그는 응급실로 가면 여러 가지 검사도 해야 하고 절차도 번거로우니 월요일에 내과를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새벽에 아프면 안 되니 그냥 응급실로 가자~" 그를 설득했다. 전에 담석 때문에 새벽에 응급실을 찾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 말대로 우린 혹시 모를 불편을 예방하기 위해 일찍 병원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향한 응급실이었는데 응급실에서 찍은 ct 소견에 이상이 있었고, 의사는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아프면 치료하면 되지~"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입원 수속을 했다.
여러 가지 검사를 받은 다음 날, 담당 주치의가 보호자인 나를 따로 불렀다.
"왜 보호자만 따로 부르지?"라고 말하는 그에게
"자기는 지금 수액을 맞고 있으니까 움직이기 불편해서 그런 게 아닐까?
금방 갔다 올게 자기야, 좀 있어봐"
나는 '이후 치료 일정에 대한 상의 정도겠지'라고 생각하며 의사에게 갔다.
의사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여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하얗게 보이는 부분, 종양이 의심됩니다."
"네?" 난 의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기 싫었다는 표현이 맞을까?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의사는 MRI 사진을 보며 다시 설명했다.
"췌장 꼬리 쪽에 2-3cm 크기의 종양으로 의심되는 병변이 보입니다.
조직검사를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지만 제 소견으로는 췌장암이 의심됩니다.
서울 병원으로 옮기셔서 조직검사를 받아보시죠."
이후 뭔가 설명을 계속했지만 의사 선생님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어제까지도 건강하던 사람한테...'
의사의 말이 끝나고 남편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믿을 수 없는 의사의 말을 남편에게 전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 자기야, 저 의사 좀 이상해..
남편은 병실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가 뭐래?"
원래 말을 돌려하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던 나는, 그날도 그랬다.
"자기야, 저 의사 좀 이상해.. 당신이 췌장암일 수도 있대... 말도 안 돼, 그치.."
그가 받을 충격을 알았더라면 좀 더 나은 방법도 있었을 텐데,
놀란 내 마음을 그가 진정시켜 주기를 바랐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부정해 주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