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암,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엄마는 참 운이 없었다.
2019년, 엄마 아빠가 아프기 전, 우리 삼 남매는 매달 모으던 경비 통장에서 돈을 꺼내어 부모님의 종합건강검진을 예약해 드렸다.
비싼 돈을 들인 만큼 마음도 뿌듯했다.
그런데 결과지에는 ‘담낭 용종’ 소견이 있었다.
우리는 엄마가 다니던 분당차병원 소화기내과를 예약했고, K교수님께 결과지를 보여 드렸다.
교수님은 “괜찮으니 3개월마다 초음파로 추적 관찰만 하자”라고 했다. 그렇게 1년여 동안, 단지 초음파만 찍으며 지냈다.
그러던 2020년 5월 8일,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담낭암 4기라고 했다.
병원은 엄마의 여명을 6개월 정도로 예상했다.
그 순간, 처음 건강검진을 해 드렸던 기억부터 K교수님의 말까지 모두 원망스러웠다.
그때 CT를 찍었더라면 조금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병원을 상대로 소송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지만, 이성적인 오빠는 “대형병원 상대로 이기기 쉽지 않다”며 나를 말렸다.
4기 암은 이미 혈액을 타고 다른 장기에 전이된 상태다.
엄마의 경우, 원발 부위는 담낭이었고, 암은 목까지 전이되어 있었다.
그렇게 치료를 위해 혈액종양내과에서 항암을 시작했고, 가슴 피부 밑에 케모포트라는 중심정맥주사관을 삽입했다.
그곳으로 항암제를 주입하고, 3주를 쉬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다행히 항암 초반에는 치료 반응이 좋았다.
처음 항암을 시작하는 환자라서 인지, 재발 환자들과 달리 눈에 띄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독성 항암제의 부작용은 생각보다 잔인했다.
첫 항암 치료 후 탈모로 머리카락이 빠져 삭발을 해야 했고, 구토와 구내염이 심해 식사를 못 하셨다.
탈모가 되고 식욕이 없어 우울해하는 엄마를 모시고 가발을 맞춰드렸다.
처음에는 좋아하셨지만, 생각보다 심한 독성 항암제의 부작용에 시달리던 엄마는 가발과 외모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몸 상태가 되었다.
한 번은 항암 직후 동생이 엄마를 모시고 쇼핑센터에 갔다가, 엄마가 식은땀을 흘리며 잠시 쓰러진 적도 있다고 동생이 말한 적도 있다.
식욕부진으로 식사를 못 하시던 엄마가 그나마 조금 먹을 수 있는 건 동네 작은 식당에서 파는 5천 원짜리 냉면뿐이었다.
장어, 삼계탕, 전복죽, 추어탕까지 몸에 좋다는 건 다 사다 드려도 손을 대지 못했다.
냉면으로 하루를 버티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더는 치료를 받을 수 없는 날이 오면, 입원을 해서 수액과 항생제로 몸을 회복시켰다.
그러면 항암 일정이 미뤄지고, 다시 치료를 시작하면 또 부작용으로 힘들어졌다.
1년여 동안 항암, 부작용, 입원과 퇴원이 끝없이 반복됐다.
엄마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지만, 그 누구보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그리고 힘든 시간을 버텨낸 끝에, 암이 조금씩 줄어드는 결과가 나왔다.
그 사실이 엄마를, 그리고 우리 가족을 한동안은 버티게 했다.
68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1년 넘게 이어지는 독성 항암제의 부작용은 엄마의 온몸을 서서히 쇠약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고생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어느 날 CT 화면 속에는 기적 같은 변화가 담겨 있었다.
의료진이 아닌 일반인인 내가 봐도 교수님께서 보여주신 컴퓨터 화면 속에 엄마의 담낭과 목까지 퍼져 있던 암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은 “어머니 체력이 너무 쇠약해져 있으니, 이제는 항암을 잠시 쉬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우리는 ‘암이 이렇게 사라질 수도 있구나’ 하는 기적 같은 기대를 품었다.
이때 까지는 암이 한번 전이가 되면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우리는, 그저 기뻤다.
가족 모두가 환하게 웃으며 서로를 안았다.
마치 이 긴 터널이 끝난 듯, 마음 한편에서 희망이 피어오르던 날이었다.
그 기쁨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교수님의 권유로 두 달 정도 항암을 쉬던 중, 그 짧은 휴식 사이 암이 재발했다.
2022년 8월, 이번에는 폐, 흉곽, 간, 늑막, 복막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암 진단을 처음 받았던 날보다 더 무겁고 두려운 현실이 우리를 덮쳤다.
다시 항암을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효과가 없었다.
독성 항암제에 내성이 생겨 더 이상 쓸 수 있는 약이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혈액종양내과와 방사선종양학과를 오가며, 의미 없는 듯한 치료를 이어갔다.
방사선 치료를 위해 엄마의 몸에는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표식이 그려졌다.
그 작은 선과 점이 치료가 끝날 때까지 지워지면 안 된다고 했다.
치료실 침대에 누운 엄마는 3~5분 정도 방사선을 쐬고 나왔다.
옆에서 보기에 항암보다 덜 힘들어 보였지만, 엄마의 표정 속 피로와 불안은 감춰지지 않았다.
엄마는 힘들어도 “다시 항암을 하면 안 되냐”라고 물으셨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더 이상 쓸 수 있는 항암제가 없다”는 말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분당차병원을 떠나 군포의 지샘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전에, 교수님은 나를 조용히 불러 “이제 통증이 심해질 테니 가족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다”라고 귀띔하셨다.
폐 전이가 심해져 언젠가는 숨쉬기조차 힘들어질 거라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믿지 않았다.
여태 수많은 고비를 이겨낸 엄마였으니까.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병원을 미리 알아두라는 말도, 그저 먼 미래의 이야기로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