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시간

엄마의 암,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by 리치그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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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7월, 2년 2개월 동안 온갖 치료를 견디며 버텨온 엄마에게 마침내 절망의 시간이 찾아왔다.

분당차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이 조심스럽게 “이제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한순간에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말은 단순한 의료적 설명이 아니라, 앞으로 닥쳐올 현실에 대한 경고였다.

그리고 그 경고는 너무나도 빠르게 현실이 되어갔다.

암성 통증은 엄마의 몸과 마음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진통제를 먹어도 잠깐뿐, 다시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은 말 그대로 사람의 ‘존엄’마저 빼앗아

가는 것 같았다.

그때 의사 선생님은 ‘담낭암 4기’에서 ‘담낭암 말기’라는 최종 판정을 내리셨다.

이제 남은 여명은 6개월 이내라 했지만, 엄마의 몸 상태는 불과 두세 달 만에 급격히 나빠졌다.

통증은 매일 더 심해지고, 숨 쉬는 것조차 힘겨운 날들이 이어졌다.

교수님은 필요하다면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길 수 있도록 소견서를 써주시겠다고 했지만, 나는 그전에 단 한 달이라도 엄마와 함께 지내고 싶었다.


나는 엄마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고자,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셔오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내 결정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돌봄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깨닫게 되었다.

그때 엄마는 이미 언제 떠나셔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전신이 쇠약해져 있었다.

음식은 거의 삼키지 못했고, 극심한 통증으로 밤낮으로 몸부림을 치고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셨다.

엄마를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는 소식을 들은 외삼촌 두 분과 외숙모들, 이모 부부가 엄마를 보러 오셨다.


더 안타까웠던 건, 내가 유방암 수술을 받은 지 고작 다섯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내 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체력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빠는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모셔야 했다.

한쪽에서는 엄마가, 다른 쪽에서는 아빠가 서로 아픈 채로 따로 떨어져 있는 현실이 우리 가족 모두에게는 참혹한 고통이었다.


엄마는 거의 음식을 드시지 못했지만, 나는 매일 새로운 밥을 지어 드렸다.

혹시나 한 숟가락이라도 드실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약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휴대폰 알람을 맞춰 두었고, 간단히라도 몸을 움직이실 수 있도록 팔과 다리를 조심스럽게 마사지하며 운동을 도왔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켜드렸다.

그 모든 과정이 체력적으로는 벅찼지만, 직접 엄마 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조금은 편하게 해주었다.

평일에는 내가 온전히 엄마를 돌봤다. 그러다 토요일이 되면 김포에 사는 오빠가 와서 엄마를 모시고 갔다. 주말만이라도 좀 쉬라는 오빠의 말없는 배려였을 것이다.

이틀 동안 오빠와 새언니가 엄마를 돌보고, 일요일 저녁이면 다시 엄마를 내게 데려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엄마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폐로 암이 전이되면서 호흡마저 힘들어져, 작은 숨결 하나 내쉬는 것도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통증으로 밤마다 잠에서 깨셨고, 결국 집에서 더는 모실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2022년 8월 26일, 엄마를 다시 분당차병원에 입원시켰다.

이제 엄마의 몸은 마약성 진통제가 아니면 하루도 버틸 수 없었다.

진통제를 맞으면 잠시 고통은 잦아들었지만,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엄마의 두 눈에서 빛이 점점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그 어떤 절망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


그 시기는, 단순히 병과 싸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가족 모두가 희망과 체념 사이를 오가며, 하루하루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몸의 통증만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간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괴롭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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