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유 없이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인색하기로 소문난 할머니의 끈기를 알고 있기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답했다.
“쉼터요.”
할머니는 예상 외로 순순하게 답한 나를 의아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미닫이로 된 슈퍼 문을 열더니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나는 무시하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걸음을 빨랐고 나의 오른쪽 손을 잡고 가게로 나를 이끌었다.
가운데에는 포차에서 쓰는 파란색 플라스틱 테이블이 있었다. 그것과 같은 색과 재질의 의자도 있었다. 등받이가 없는 그 의자 위에 나는 앉았다. 할머니는 냉동고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왔다. 받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만 봤다.
“먹어, 안 받아.”
이번에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의 고집을 겪었던 터라 군말 없이 받았다. 봉지를 뜯고 꽁다리를 꺾어 입에 넣었다. 달달한 소다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할머니는 어느새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미닫이 유리문 너머로 앞동네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저기 모습이 너무 밝아.”
할머니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창 너머의 어두운 밤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구름만 두둥실 떠다녔다.
“별빛이 안 보여.”
제대로 별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할머니의 말에 아무 생각도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파트 단지들을 따라 도로의 가로등을 따라 화려하게 빛나는 동네를 노려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 저렇게 될까.”
다행히도 할머니는 내게 답을 기대한 게 아니었던 듯했다. 그 이후로도 중얼거리듯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듣고 싶지도 않았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 아이스크림 먹기에만 열중했다. 다 먹으니 몸의 열기가 조금 식은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집에 가서 잠에 들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원래대로 쉼터로 가야 하나.
형광 조끼를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여성 안심 귀갓길’이라고 쓰인 판이 들려 있었다.
“이걸 붙인다고 동네 살기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는 넉살 좋게 웃었다.
사람들이 잘 보이게끔 설치를 하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건강 잘 챙기라는 말과 함께 어두운 골목길 안으로 사라졌다. 할머니는 손을 뻗어 팻말을 한 번 건드리고나는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내 방 시원해, 들어가서 자.”
내키지 않아 밖으로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는 내 의사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미닫이의 걸쇠를 올려 잠갔다.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자.”
할머니와 실랑이를 해봤자 잘 시간만 줄어들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의 살림살이는 많지 않았다.
낮은 원형 밥상 위에는 교과서에서나 봤을 법한 전화기와 작은 거울이 놓여 있었다. 맞은편에는 3단 체리색 서랍장이 보였고 그 위에는 컴퓨터 모니터만한 작은 TV가 있었다. 그 옆에는 어울리지 않은 따뜻한 우드색의 장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다른 가구들과 달리 깨끗하고 세련되어 보여서 이곳과 어울리지 않았다. 바닥에는 이미 이불이 깔려 있었다. 노란 장판을 2/3정도 가린 크기였는데 할머니와 내가 자기에는 좁지 않아 보였다.
할머니는 내가 눕는 것을 보고 등을 껐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 사이로 할머니의 숨이 섞여 들렸다. 누운 자리 위로 에어컨이 바로 있었다. 아까는 더워서 잠이 들기 어려웠다면 지금은 추워서 잠이 들기 어려웠다. 할머니가 깨지 않도록 이불을 조금씩 당겨 목 끝까지 덮었다. 할머니의 낯선 냄새가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