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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강 May 07. 2024

E13. 우물

(아랫글은 필자의 친구인 육원수 목사의 설교 원고를 근간으로 필자가 재구성한 글이다.)

     

 지금은 수돗물이 우물물을 대신하고 있지만 마을이 형성된 곳은 반드시 우물이 있었다. 우물이 없는 마을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우물은 인간의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지금으로부터 60~70년전 어간에 살았던 신촌에서 대여섯 번 이사했는데, 이사 가는 곳마다 집 안 마당에 우물이 있거나 집 근처에 우물이 있었고, 요즈음 청년들은 잘 모르겠지만 두레박에 긴 줄을 매달아 물을 푸던 기억이 난다. 지금처럼 수도(水道)가 집마다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수도 있는 집에서 그때그때 마다 돈 주고 물을 사 물지게로 지고 오곤 했던 기억이 있다. 정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이다. 하여튼 우물이란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인간은 물 없이 생존할 수 없다.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의 80% 이상이 물이다. 4대 문명의 발상지도 강을 끼고 문명이 번창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땅이나 물에 대한 개념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은 다르다. 그들은 땅은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어서 성지(聖地)로 믿고, 50년마다 희년이 돌아오면 토지의 원주인에게 돌려준다. 이스라엘은 물은 귀한 곳이기 때문에 물은 구원의 상징이다. 이 지역에는 와디(Wadi)라고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고 건기 때는 말라 있는 하천이 있다, 출애굽기 17장 1~7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반석(盤石)에서 물을 내어 마실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우물과 관련된 성경적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우물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의 며느리를 들이기 위해 자신의 늙은 종을 자기의 고향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동생 나홀(Nahor)의 집으로 낙타 열 마리와 예물을 지어 보내는 얘기로 시작한다. 늙은 종은 수일을 걸려 나홀의 동네에 도착해서 우물가에 이르게 된다. 우물은 통상 성 밖에 있었고 당시 우물을 긷는 것은 여성의 일상적인 일이었다. 주로 한낮의 더위를 피하여, 아침이나 저녁 선선할 때 물을 긷는다. 그 당시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오늘날처럼 사진을 갖고 가지도 않고 나홀이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데 우물가에서 우연히 물을 길으러 나온 나홀의 손녀 리브가(Rebekah)를 만나게 된다. 늙은 종이 리브가에게 마실 물을 청했는데 리브가는 늙은 종이 마실 물뿐만 아니라 같이 여행한 낙타들에게도 물을 준다. 그 종은 그런 사려 깊은 리브가를 하나님이 짝 지워 주신 아브라함의 며느리감으로 보고 가지고 간 패물을 준다. 늙은 종은 이때까지 그 처녀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인지도 모르고서 이삭의 아내로 정한 것이다. 창세기 24장 27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리브가를 만나게 되었다고 신앙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성경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 그렇다. 늙은 종은 마음의 소원과 일의 계획은 인간에게 있을지라도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다.

      

 창세기 26장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우물을 기업으로 받은 이삭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아브라함은 재산을 많이 갖고 있었다. 외아들 이삭은 이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받았다. 그리고 농사를 지어서 풍성하게 수확하였다. 그의 종들의 수가 심히 많았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이삭이 사용하던 우물들을 막아서 그의 일행을 쫓아버리려고 하였다. 이 당시 블레셋 민족의 대부분은 크레테 섬에 살고 있었고, 가나안 땅에는 일부만이 정착해 있었다. 그들의 집단적인 이주는 수 세기가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따라서 가나안에 미리 정착했던 사람들의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강우량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는 예로부터 우물이나 샘물의 소유권을 둘러싼 싸움이 잦았다. 이 다툼은 피를 흘리는 싸움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이삭이 장소를 옮긴 것도 이와 같은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우물들을 메웠지만 이삭은 그 우물들을 파서 아버지가 불렀던 이름을 붙여 사용하고 이어서 블레셋 사람들이 메우면 이삭은 다른 곳의 우물을 파서 사용하였다. 블레셋 사람들이 메우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해도 서로 다투지 않게 되고 이삭은 우물로 인한 분쟁을 피하고 참고 인내한 후에 농경지 확장으로 번성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잠언 16장 32절에 보면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이 잠언의 말씀이 이삭에게 정확히 적용됨을 보게 된다. 우물을 메우는 블레셋의 도발에 참고 인내함으로 다툼을 통해서 얻는 것보다 더 큰 유익을 취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상속자인 이삭은 아버지가 파고 블레셋에 의해 메워진 우물들을 다시 파고 그 우물의 이름도 아버지가 지은 이름을 사용하고 나중에는 결국 자신의 판단으로 우물을 파서 경작지를 넓게 하고 크게 번성을 이루게 된다. 부모의 소유를 소중히 생각하고 이어받은 것 이상으로 번성하게 되는 이삭의 지혜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4장 14절에는 수가성 우물과 예수님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방에 들어가서 우물가에서 한 여인과 대화하면서, 영생과 참된 예배의 의미와 자신이 바로 메시아임을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우물에서 길은 물과 자신이 주는 생수를 대조시켜, 우물의 물은 반복되는 갈증을 막을 수 없고 육신의 만족만을 채울 수 있을 뿐이지만, 자신이 주는 생수는 영혼을 소생시켜서 영속적이고 참된 만족을 준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물이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이듯이 예수님의 믿음은 구원의 삶에 이르는 영적 우물이다. 우물이 우리 인간의 생명을 존속하게 하고 우리 삶의 거처에 함께 하듯이,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믿는 우리 심령에 함께 하셔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물의 물은 매일 마셔야 한다. 우물에서 물을 길지 않으면 그 사람은 물을 먹을 수 없다. 우리가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물에서 물을 퍼야 한다.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영적인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해야 한다. 성도의 우물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주님의 몸인 교회이다. 성도들이 교회라는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오면 복음을 듣고 서로 합력하여 기도하게 된다. 교회라는 신앙과 정보의 우물에 나와 물을 긷듯이 믿음의 소식들을 접하고 영적 능력을 충전하게 된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그의 아들로 믿는 순간 영권(靈權)을 갖게 된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생수이다. 우물의 물을 두레박으로 퍼서 쓰지 않으면 얼마 가지 못해 이끼가 끼고 썩게 된다. 우리가 참된 기쁨, 참 행복, 참 만족을 얻으려면 구원의 우물을 내 마음에 파야 한다. 늘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마음의 우물물을 퍼야 한다.

     

 우물은 나누어 마셔야 한다. 구약 성경 이사야 12장 4절에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한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는 최초의 언어는 감사이다. 신앙인으로 입문한 사람이 처음으로 배우는 말이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런 일화가 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건져 주었는데, 정신을 차린 그가 자신을 구해준 사람에게 맨 먼저 할 말이 무엇일까? ‘여보시오, 당신 몇 살입니까? 어디 사십니까?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첫마디가 ‘감사합니다’이다. 이사야 12장 4절에서 감사의 대상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고 있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라고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다. 주의 이름이다. 다른 이름을 부르며 감사하면 안 된다. 나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신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다음에 내가 감사하고 있다는 그 사실과 내용을 만국 중에 선포해야 한다. 세상의 우물들은 많은 사람이 퍼 가면 마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는 구원의 우물은 수많은 사람이 퍼 가더라도 동이 나지 않는다. 이는 퍼갈수록 펑펑 쏟아져 나오는 생명수다. 이사야 12장 5절에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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