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장사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는 산 하나를 품고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농사를 주업으로 삼은 동네는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고, 시집을 오거나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 말고는 인구 변동이 거의 없었다. 마을에 60 가구 남짓이 모여 살았고, 마치 한 가족 같은 이웃들은 언제나 가까이서 서로를 돕고 의지하며 살아갔다.
마을에 하나뿐인 작은 점방에서는 주로 농부들이 목을 축일 막걸리와 소주를 팔았고, 과자 몇 가지도 구색을 맞추듯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돈이 귀하던 시절이라 아이들은 이 점방을 기웃거리기만 할 뿐 물건을 사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과자는 ‘뱅기과자’뿐이다. 요즘 생맥주집에 가면 곁들이로 나오는 마카로니와 비슷한 과자로, 비행기를 닮았다고 해서 우리는 이 과자를 ‘뱅기과자’라고 불렀다. 어쩌다 돈이 생기면 점방으로 달려가
“아줌니, 뱅기과자 줘유. 뱅기과자유”
충청도 사투리를 진하게 내뱉었던 기억이 난다. 워낙 작은 점방이다 보니 없는 것이 더 많았다. 점방에 없는 것은 5일마다 열리는 오일장을 기다려 살 수밖에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40분 정도 걸어가야 있는 오일장은 마을 사람들에겐 보물창고 같았다. 평소에 보기 어려운 생선, 고기, 건어물, 옷가지 등 온갖 물건이 넘쳐났다. 하지만 농사일로 바쁜 동네 사람들은 장날에도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해 뜨면 나가서 해가 저물어야 돌아오는 삶이었기에 물건을 사러 갈 틈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이웃들에게 귀한 존재가 되었다. 친정이 대전인 엄마는 마을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을 대신 사 오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대전에 가는 엄마에게 옷과 생활용품을 사달라고 부탁하기 시작했고, 엄마는 자연스럽게 옷을 떼다 파는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엔 우리 동네에서만 소소하게 하던 엄마의 장사는 차츰 옆 동네, 그 옆 동네까지 넓혀 갔다. 아버지와 우리 자식들이 모두 학교에 간 틈을 타, 엄마는 보자기에 싼 옷을 머리에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옷을 팔았다. 좋은 인심을 만나는 날은 점심 한 끼라도 얻어먹지만, 그러지 못한 날에는 온종일 굶고 길을 걸어야 했다. 교통이 불편한 시절, 엄마는 무거운 옷 짐을 머리에 이고 마을 곳곳을 다니며 발로 뛰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 덕에 늘 ‘사모님’이라 불렸다. 원래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익숙하지 않던 엄마가 옷 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의외의 일이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의 작은 부탁을 들어주기 시작하면서 엄마는 서서히 변해 갔다. 처음엔 어렵게만 느껴졌던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익었다. 사람마다 취향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어울릴 옷을 권하며 엄마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옷을 고르며 환하게 웃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며 엄마는 묘한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꼈고, 이런 소소한 경험들이 엄마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엄마의 장사 수완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고, 점점 더 많은 이웃들이 엄마가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현금이 귀한 시골이라, 엄마가 파는 옷은 외상으로 거래되는 일이 잦았고, 그럴수록 엄마의 외상장부는 두꺼워져 갔다. 그러던 중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을의 변화와 함께 엄마의 단골도 줄어들었고 엄마의 외상장부도 점점 비어갔다. 그 후 엄마는 옷장사를 접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머리에 무거운 짐을 이고 하루에도 수십 리를 걸으며 옷을 팔러 다녔던 엄마는 결코 나약하거나 소극적인 분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을 위해 지친 줄도 모르고 다녔을 그 길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노고가 아니라, 이웃들에게 작은 기쁨과 따뜻한 정을 나르는 여정이었다. 엄마는 옷장사를 하며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는 뿌듯함을 느끼셨을 것이다. 엄마의 장부에 적힌 외상 기록들은 단순한 거래의 목록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과 함께 쌓아온 인심과 신뢰의 흔적이었고, 그 속엔 가족을 위한 헌신과 스스로를 향한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