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몬태나 보즈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예전에 함께 연구과제를 수행한 적이 있었던 한국 교육과정 평가원의 어느 박사님이었다. 함께 교과서 심사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휴직하기 전에 2015 개정 교육과정 개발하는 일에 참여를 했었는데 그것으로 인해 추천이 되었다며 함께 하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물론 너무 좋다고 말씀드렸다.
교과서 심사하는 일은 십 년 전에도 해 본 일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교수진과 교사진이 모여 머리를 맞대고 각 교과를 심사하는 일이다. 방학 기간에는 긴 합숙도 하고 몇 개월 간 집에서 재택근무도 하면서 검토하고 의견을 내는 일이라 쉽지는 않은 일이다. 하지만 교과서의 내용을 심도 있게 살펴보고 내 의견을 낼 수 있기에 교사로서 매우 보람된 일이었다. 또한 교과서에도 이름이 실리기에 여러모로 뿌듯했다.
더 좋았던 점은 일을 많이 하는 만큼 수당이 굉장히 높았다. 박사논문을 쓸 때 욕심을 내어 전국 공립학교 교사수의 0.5%에 해당하는 1,670명에게 설문지를 돌렸었다. 전국을 대표할 만한 많은 수를 대상으로 설문을 돌려 결과를 얻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박사 심사 때 수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이 무척 많이 들었다. 인쇄값, 택배비, 기념품비 등 몇 백만 원이 들었다. 정말 감사하게도 그때 당시 교과서 심사를 통해 받은 수당으로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교사로서 학교일 이외에 대학 강의, 교육청 강의, 연구과제 등 많은 일을 해 보았지만 대부분 수당은 매우 짜다. 학교 교사 이외의 일은 겸직으로 간주되기에 몇 시간을 강의해도 수당은 몇만 원에 그친다. 돈보다는 보람으로 하는 일이고, 돈을 보고 일을 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교과서 심사처럼 일도 많이 하면서 수당도 많이 준다면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전혀 나쁠 건 없는 게 당연하다.
이번 일을 할 수 있게 있다면 지급되는 수당을 모두 비행기 값으로 쓰게 되더라도 몬태나에서 한국으로 당장 가고 싶었다. 18년 교직생활의 관성 때문인지, 원래 꿈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몬태나 생활이 너무 좋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허전했다. 자면서 꿈을 잘 안 꾸는 나였지만, 어쩌다 한 번씩 꿈을 꿀 때면 꼭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선생님들과 회의하는 내 모습이 나왔다.
연락 주신 박사님께 한 가지 질문을 드렸다.
"휴직 중인데 괜찮나요? 오히려 시간이 많아서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사님께서는 그건 잘 모르겠다며 여쭈어 본 후 알려주시겠단다. 그 뒤로 교과서 심사를 핑계로 한국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일주일 후 온 답변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휴직교사를 심사진으로 써 본 전례가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곤란할 거 같다는 의견이 나왔다고 하셨다. 힘이 빠졌다.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심사를 할 땐 수업하랴, 행정업무 하랴 바쁜 일정을 쪼개 심사를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휴직 중이니 시간이 많고 더 열심히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교사로서 교육과정 개발진으로서 교과서에 어떤 내용들이 있을지도 너무 궁금했는데 휴직교사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마음은 더 허전해졌다. 몬태나에서도 교사로서 꿈을 펼치고 싶었다. 휴직교사라고 집안일만 하고 아이만 돌보며 생활하기에는 허전한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다. 또 주변에서 한국의 문화와 한국어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내게 속속 나타났다. 그때 중학생 학부모였던 미나 언니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미나 언니는 미국 생활을 오래 했고 대학 졸업 후 미국에 와서 공부하며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하시며 내 마음을 많이 이해해 주신 분. 마음이 힘들 때 언니가 해 주신 기도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미나 언니는 미국의 학교는 자원봉사나 재능 기부할 기회가 많다며 내게 추천하셨다. 정말 좋은 제안이었다. 여러 가지 유형의 자원봉사가 있겠지만 나는 한국의 선생님으로서 한국을 알리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언니는 딸이 다니는 중학교 교장에게 메일을 써서 나를 한국어 교사로 추천을 해 보겠다고 하셨다.
이호 사장님께도 자원봉사로 한국과 한국어를 알리고 싶다고 상의를 드리니 시의원 회의할 때 교육담당자에게 상의를 해 보겠다고 하셨다. 조안나 선생님에게도 말씀을 드렸더니 혹시 주변에 한국어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연결을 해주시겠단다. 주변의 많은 분들께서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했다.
어느 날 미나 언니는 내게 소개해 줄 친구가 있다고 했다. 딸이 다니는 중학교 학부모 모임 때 알게 된 친구인데 대만에서 왔고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잉. 몬태나 보즈만에 있는 월드 랭귀지 이니셔티브라는 세계 언어와 문화를 알리는 비영리 단체의 소속 교사로 활동을 하는 친구였다. 중학교와 초등학교에서도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잉은 그 단체의 리더인 엘리자베스에게 나를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이후 잉과 친해져서 가끔 만나 아이들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참 잘 갔다.
알고 보니, 엘리자베스는 똘똘이가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가끔 보았던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딸은 초등학교 고학년, 우리 아들은 유치원생(참고로 미국의 공교육은 유치원부터 시작)이었지만 하교시간이 비슷해서 아이를 픽업할 때 운동장에서 몇 번씩 마주쳤다. 엘리자베스에게 인사를 하니 안 그래도 잉의 메일을 받았다며 너무 반가워했다. 아시아 언어로는 중국어밖에 없어서 한국어를 맡아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며 고맙다고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코치로 함께 일을 하고 학교에서 수업을 하려면 자원봉사자로 시에 등록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알려 준 홈페이지로 들어가서 개인정보를 입력하니 검토 후 결과를 알려주겠다는 알림창이 떴다. 며칠 후 드디어 자원봉사 등록증을 우편으로 받았고 나는 한국어로는 처음으로 월드 랭귀지에 코치로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몬태나에서 한국어 코치로서의 꿈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