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눈물을 머금고 맞았던 주사를 매일 집에서 맞게 되었다. 주사를 극도로 싫어하던 엄마는 딸 간호를 위해 머지않아 주사와 친해지게 되었다. 주사를 놓을 때마다 깊은 심호흡을 하던 엄마가 이제는 심호흡없이 주사를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어려서 그랬을까. 나도 그게 디게 싫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을까? 그 때 당시, 주사맞는게 너무 싫다는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도 그 느낌이 남아있었으리라. 지금 그런 생각이 나지 않는 걸 보면 너무 어렸거나, 아님 그 당시에도 금방 나을꺼라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후, 엄마는 종종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한 10년만 잘 기다려보자. 10년이면 치료법이 나오지 않겠나. 대신 치료법 나올 때까지만 눈만 조심하거라. 눈이 잘못되면 진짜 몸이 많이 망가진거라고 하니까… 그 때까지 눈만 조심하고! 알아쩨?”
이 때, 예상했다. 아 이 병이 아직 치료법이 없다는 것을. 치료법이 나올 때까지 이 주사를 매일 맞아야된다는 것을 이 때 예상했으리라.
어마무시한 중딩 시절,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그래도 엄마 말을 잘 따랐다. 종교생활로 수도를 겸하던 엄마가 당뇨 걸린 나와 가족들을 같이 대동하고 참배를 다니기 시작하셨다. 엄마가 가자하면 두 말없이 우리 가족 모두 따라 나섰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중학생이 되었다. 중학생이 된 나는 가족과 보내는 시간보다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즐거워지기 시작했고, 엄마 말을 따르지 않기 시작했다. 그렇게 집에서 수도하는 사람은 엄마 혼자로 축소됐다.
나의 사춘기는 소리 소문없이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엄마는 고기를 일체 드시지 않으셨다. 연세가 드신 지금의 엄마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고기도 많이 드시지만, 당시 엄마는 그냥 고기 냄새가 싫어 안드셨다고 하셨다. 단백질 보충을 주로 콩으로 하셨다. 그 덕에 우리 가족들은 콩을 참 많이 먹은 듯 했다.
어쩌다가 먹은 치킨이 왜 그렇게 맛있었을까. 당뇨 걸리기 전,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우연히 먹은 치킨에 반해 매일 치킨을 시켜 먹으니, 엄마가 안 되겠다며 수요일만 시켜 주겠다하셔서 동생과 손꼽아 수요일만 기다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요일, 동생 손잡고 통닭 집 가서 사 들고 집으로 가는 길이 어찌나 그리도 좋았는지.
그 때는 생선도 안 해주셨는가. 당뇨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원 식단으로 나온 갈치구이 맛을 37세가 된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이 있다고? 아마 그 때 갈치라는 녀석을 처음 접한 게 아닌가 싶다.
이렇 듯 고기, 생선, 가공식품을 일체 드시지 않았던 엄마는 당뇨인 나를 위해 나물로 가득 찬 도시락을 싸다 주셨다(내 중학생 때는 도시락 싸 다니던 시대였다). 학교에서 나와 같이 도시락을 먹는 친구들의 반찬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고급진 음식으로 가득했다. 계란말이, 전, 머니머니해도 내 눈에 크게 들어왔던 햄과 소세지… 온통 풀때기 밖에 없던 내 도시락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 눈은 도시락의 초라함은 온데간데 없다. 그저 나의 눈은 그 햄과 소세지에 꽂혀 있었다. 친구들의 도시락을 보자마자 내 젓가락은 이미 그 소세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순간 내 도시락을 봤다. 친구들에게 줄 수 있는, 같이 나눠먹을 수 있는 반찬이 내게는 없었다. 민망했다. 맛있는 친구들의 반찬을 득달처럼 달려들어 먹고 있는 내가 느껴졌다.
‘ 아… 이러면 친구들이 싫어할텐데…’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내 머리와 행동이 일치되기 힘들었다. 생전 한 번 보기 힘든 반찬들은 지금 이 시간. 친구들과 같이 도시락을 나눠먹는 이 때가 아니면 절대, 내가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친구들이 싫어해도 소용없었다. 우선 지금 이 순간, 내 원과 한을 풀어야만 했다. 내 도시락엔 손대지 않은 채 미친듯이 뺏어먹었다. 시간이 지나고 날이 지나면서 나와 같이 밥을 먹는 친구들의 표정도 좋지 않아지는 걸 머지않아 느낄 수 있었다. 몇일 뒤, 같이 밥먹던 부반장(당시 부반장이 요일별로 있었다)이었던 친구가 잠시 이야기 좀 하자고 찾아왔다. 눈치 백단 나는 알았다.
드디어 디데이가 왔구나.
“진짜 미안한데… 밥 우리끼리 먹어도 될까?”
아직도 그 친구의 표정이 생생하다.
그 친구들 사이에서 총대를 메고 왔으리라. 이야기는 해야겠고, 나에겐 너무 미안하고.
그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하자마자
“어. 그럴께. 괜찮아.”
그 말을 듣고도 너무나 멀쩡한 내가 더 이상했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곧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을까. 너무 미안해하며 이야기하는 그 친구에게 오히려 이런 어려운 말을 하게 만든 게 더 미안해서 괜찮다고 계속 위로하고 들어왔다.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 뒷자리로 가서 조용히 도시락을 펴 먹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참말로 초라했지만, 예상했던 상황이라 나름 괜찮았다. 조용히 혼자 밥 먹는 것을 지켜보던 다른 친구 한명이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같이 밥먹자. 여기로 올래?”
인연이란 게 참 희안하다. 이 친구와 나는 둘도 없는 절친이 되었다.
집에서 간식거리를 보기가 어려웠다. 간식만 보면 득달처럼 달려드는 나를 위해 엄마는 집에 간식을 쟁겨 두지 않으셨다. 나야 당뇨라는 친구 덕에 그렇다지만, 건강하지만 누나의 지병 때문에 같이 먹지 못하는 아들이 엄마는 마음에 걸렸으리라.
한 번씩, 엄마는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동생만 조용히 불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방 문을 잠근다. 더럽게 눈치만 빨랐던 나는 엄마가 왜 그러 하는지 눈치채고 방 문에 귀를 댄다. 아주 조심스럽게 뜯기는 봉지소리. 뭐를 먹는 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나보다. 나 몰래 조용히 뜯기는 봉지소리를 들으며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문 열고 들어가서 나도 달라고 떼쓰거나 하지 않았다. 소리없이 울며, 그 소리를 들으며 올라오는 울분을 참고 삭혔다.
그 때부터였을까.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집에서 안되면 나가서 라도 그 원과 한을 풀어야만 했다. 천 원짜리가 눈에 보인다. 천원 한 장을 뺐다. 그 돈으로 학교가면 매점에서 나나콘(노랑빛을 띈 아주 달콤하고 딱딱한 과자)을 그리 사 먹었다. 중학교 시절 친구들은 아직도 '나나콘'만 보면 내가 생각난다고 한다. 이 과자가 얼마나 달콤하고 맛이 있던지, 그리고 단단하여 씹히는 맛이 일품이었다.
왜 다른 과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뭔가 맺힌 원과 한을 딱딱한 과자를 아그작 씹으며 어느정도 해소가 되지 않았을까? 다른 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매점에 가면 늘 나나콘을 사와 먹었다. 정말 희안한 일이다. 왜 나는 선생님들의 배려를 그리도 많이 받았을까. 고등학교 시절, 지나친 선생님들의 배려로 친구의 미움을 산 적도 있었다. 그러고보니 중학생 시절에도 선생님들의 배려가 있었다. 매점에서 사온 나나콘을 다 먹기에는 쉬는 시간 10분이 너무나도 짧았다. 먹다 남은 나나콘은 늘 책상서랍에 모셔졌다. 먹는 걸 주체하지 못했던 나는 수업시간에도 손을 넣어 빼낸 나나콘은 여지없이 입 속으로 들어갔다. 눈치챈 주변 친구들이 나를 한 번 보고, 선생님도 한 번 보고.
그 소리가 안 났을리 만무한데 단 한번도 핀잔을 준 선생님이 없었다. 아무도 뭐라하지 않으니 내 행동은 더욱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무안했다.
혼자먹기가.
주변 친구들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쌤들이 뭐라하시지 않으니 나나콘을 받아 든 친구들이 키득대며 같이 먹어줬다. 그렇게 친구들과 나눠먹기 시작하니, 내 입에 들어갈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 날 밤, 잠자는 엄마 몰래, 다시 엄마 지갑을 뒤졌다. 5천 원짜리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눈치 살짝 보고는 이번에는 천 원이 아닌 오천 원을 손에 쥐었다. 다음 날, 학교 쉬는 시간마다 매점으로 가서 나나콘을 사 먹었다. 친구들과 나눠 먹어도 충분한 돈이 있었으니, 내 마음이 태평양 마냥 넓어진 듯 다 퍼주며 같이 나눠 먹었다. 애들이 무서워 하는 학교 짱이라는 친구가 우리 반에 있었다. 그 친구가 한번 씩 나도 챙겨주며 나를 참 귀여워했다. 나의 나나콘을 뺏어먹는 친구들한테
“ 야, 미니꺼 뺏어먹지마라.” 하여 챙겨줬던 기억이 난다.
아마 쌤들도, 그 친구도 나의 당뇨라는 병을 알았으리라.
중학교 2학년 시절, 본격적인 미춘기가 시작되었고, 나의 극심한 환난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