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허세도쿄 09화

손등 위의 작은 토크쇼

도쿄 여자들의 손등 위에 펼쳐지는 레이어드의 언어.

by Asparagus




도쿄 여자들의 손등은 늘 시끄럽다.

하지만 그 소란은 조잡하지 않고, 묘하게 세련됐다.

카페에서 커피잔을 드는 순간에도, 회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순간에도,

손등 위에 겹겹이 쌓인 반지들은 마치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는 것 같다.


나는 파리에서도 이런 손등의 언어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거기엔 간격과 숨결이 있었다.

파리의 손등이 여백 많은 산문이라면,

도쿄의 손등은 빽빽하게 채운 콜라주였다.


실버와 골드가 서로 부딪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체인 팔찌가 중간에 불쑥 걸려 있으며,

살짝 벗겨진 네일까지 하나의 문장처럼 끼어든다.

그 혼잡함은 오히려 더 개성적이다.


한국에서도 액세서리를 잘 활용한다.

하지만 일본처럼 손등에 이야기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방식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한국이 스타일링이라면, 일본은 편집 디자인에 가깝다.


재밌는 건, 그 반지와 팔찌에 얽힌 사연들이다.

“이건 성인식 때 엄마가 사주신거”

“이건… 옛날남친이 사준거 (지금 남편이 모르면 됐지 뭐.)”

“이건 출산 기념으로 내가 나한테 선물한거야 .”


그러니까, 도쿄 여자들의 손등은 단순히 장식이 아니다.

거긴 인생의 기념일과 비밀 이벤트들이 겹겹이 새겨져 있다.

달력 대신 반지가, 다이어리 대신 팔찌가, 그들의 히스토리를 말해준다.


가끔은 손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생 요약본을 훔쳐 읽는 기분이 든다.

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이혼도 했고, 재취업도 했고, 여행도 다녀왔지. 다 살아냈다.”


회사 동료의 경우

디자인 작업을 할 때마다 그녀는 묵직한 레브라도라이트 파워스톤 반지를 꼭 끼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그렇게 큰 반지 끼고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 영감 받을 땐 꼭 이 반지를 껴야 돼. 부적 같은 거거든.”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마다 영감의 스위치는 다르다.

누군가는 커피고, 누군가는 반지다.


또 다른 동료는 반짝이는 다이아 반지를 끼고 있었다.

백열등 불빛에 반짝이는 그 빛에 반해, 나는 물었다.

“와, 너무 예쁘다. 어디 거야?”

“해리 윈스턴.”

내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렀다.

“와—”


그러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전남편이랑 맞춘 결혼반지. 근데 예쁘잖아. 그래서 그냥 끼고 다녀.”

그리고는 쿨하게 웃었다.


그래, 반지는 죄가 없다.

사람은 떠나도 보석은 여전히 반짝이는 법이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믿는다.

처음 만난 그녀가 반지를 끼고 있다면,

그건 사실상 최고의 아이스브레이킹 도구다.


그녀의 손등을 보고 한마디 해주면 된다.

“와, 그 반지 진짜 멋지다.”


그러면 순식간에 에피소드들이 튀어나온다.

순간, 손등 위의 작은 반지들이 테이블 위에서 토크쇼의 패널이 된다.

각자의 순서에 맞춰 이야기를 쏟아내고,

그 속에서 자연스레 웃음이 번진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자.

커피값을 대신 내는 것도, 기막힌 농담을 준비하는 것도 필요 없다.

단지 그녀의 손등을 보며, 가볍게 칭찬하면 된다.


그 순간, 대화는 이미 반짝이기 시작한다.




사진 Instagram @ adlinh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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