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스는 그릇을 타고온다.
조용한 사치, 마음을 담는 도구
유카 오와다의 접시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순간엔 말보다 침묵이 더 정확한 반응이니까.
그건 투명한 밤하늘 같았다.
아니, 투명한 밤하늘이 만든 접시 같았다고 해야 할까.
툭 던지듯 말아올린 곡선엔 무심함의 미학이 있었고
안쪽에는 이쑤시개로 살짝 누른 듯한 요철이
일정한 리듬으로 박혀 있었다.
그건 그녀만의 음악이었다.
지극히 사적인,
다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리듬.
나는 그 접시에 감자를 올리는 걸 좋아한다.
삶은 감자, 구운 감자, 으깬 감자.
솔직히 뭐든 괜찮다.
감자가 말을 안 해도,
접시가 알아서 설득해준다.
그 접시는 감자를 ‘문학적 식재료’처럼 보이게 만든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어느 날은 감자가 카뮈처럼 보였고,
또 어떤 날은 스탕달 같았다.
접시가 요리보다 더 요리인 순간.
나는 그 마법을 믿는다.
나카자토 하나코의 그릇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다.
백자의 여백 위에 수묵 한 방울이 ‘툭’—
말끝을 흐리는 사람처럼,
그릇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나는 여기 있지만, 주인공은 아니에요.”
그릇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존재하지만 튀지 않는 존재.
도쿄에선 그런 걸 ‘센스 있다’고 부른다.
나는 그 그릇에 자주 국을 담는다.
된장국, 다시마국, 멸치국물.
바쁘고 약간 기분이 가라앉은 날엔
그 국그릇에 국을 따라,
천천히 마신다.
그러면 국물의 따뜻함에 맞춰
내 기분도 가라앉는다.
정확히, 국물의 온도만큼.
그건 잠수와도 비슷하다.
천천히 수면 아래로 내려가,
조용한 생각들을 하나하나 만지는 일.
충분히 그렇게까지 할 수 있다.
잘 만든 그릇은 사람을 조용하게 만든다.
그건 반쯤은 예술이고,
반쯤은 철학이다.
왜 박물관엔 옛 옷보다
백자가 더 오래 남아 있을까?
아름다움엔 ‘쓸 수 있음’이라는 조건이 붙을 때
더 오래 견디기 때문이다.
혼자 살 땐,
무인양품 세트 하나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위해 밥을 짓기 시작하면서
내 식탁에 올라올 그릇을 고민하게 됐다.
그 순간부터
내 안의 ‘그릇 덕후’가 조용히 눈을 떴고,
그 눈은 아직도 감기지 않았다.
“이거,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런 말 한마디에 선물받은 그릇은
사실, 감동의 결정체다.
그릇을 고르려면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대의 식성, 색감 취향, 아침 식사 루틴까지.
거의 연애에 가깝다.
그릇은 사랑의 기술이다.
그리고 때로는,
센 척의 도구이기도 하다.
“이거 유카 오와다 거야. 일본에서도 오프라인 한정.”
“유약 바르기 전에 구운 거라 텍스처가 살아 있어.”
“너 파스타 좋아하잖아? 이 접시에 담으면 진짜 예뻐.”
그릇을 건넬 땐
이런 말을 살짝,
마치 별것 아닌 듯 얹어두면 된다.
마법의 주문은
늘 작게 속삭이는 게 효과가 좋다.
그리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
“넌 왜 그렇게 그릇을 좋아해?”
나는 진지하게 대답한다.
“그릇은 날 실망시키지 않거든.”
아이가 밥을 안 먹는 날에도,
남편이 또 양말을 뒤집어 빨래통에 넣는 날에도,
택배가 지연되는 날에도—
그릇은 그 자리에 있다.
조용히, 묵묵히, 나를 기다린다.
그건, 애인보다 더 낫다.
나는 오늘도 국을 끓이고,
그 국을 담을 사치를 꺼낸다.
조용한 사치.
아무 말 없이 나를 감싸는, 오래된 안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