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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입시준비를 시작하다.

by 삐아노

쇼팽 에튀드를 어떻게 쳤는지는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분은

내 연주를 다 듣고 나자

인자하신 미소를 띠고 말씀하셨다.



"취미로 치면 너무 대단하다고 박수받을 거예요."



잠깐 선덕선덕했다가-



"그런데 전공으론 어려워요."



쿵! 내려앉았다.



그래도 입시에 도전하고 싶다면 자기는 지금 개인교습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입시에 강한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주신다고 했다.


소개받은 선생님은 분당의 한 마을에 살고 계셨다.



나는 그때 당시 정동에 있는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 터라 학교가 끝나면 시청역까지 걸어가 빨간 광역버스를 타고 선생님 댁으로 향하곤 했다.



가는 길은 그린벨트를 지나야 하는 등 은근히 멀었는데

그 시간에 나는 주로 음악을 듣곤 했다.

신들린 듯 치는 대가의 연주에 감탄하며 '오늘 레슨 때는 이 해석을 따라 해 봐야지' 하고 생각했으나 애석하게도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선생님댁에 조금 일찍 도착하면 근처 공원에 가서 흰 두루미도 보고 간식도 먹으며 남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문구점에서 플라스틱 반지 뽑기를 했던 것이 당시의 소소한 추억이다.



선생님 댁은 아파트 1층 가장 오른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문 앞으로 가까이 가면 언제나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님의 피아노 방에는 갖가지 고풍스러운 장식물, 수집품들이 멋지게 진열되어 있었고 책장에는 무수한 악보들이 꽂혀있었다.

가죽 의자에 앉아있노라면 마치 엔틱 카페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은 단발머리에 똑소리 날것같이 명쾌하면서도 현명하신 중년 여자분이셨다. 선생님과 처음으로 배운 곡은 아마 드뷔시 베르그마스크 모음곡 중 1번 프렐류드와 쇼팽 폴로네이즈 op.26 no.1 이었을 거다.


드뷔시 베르그마스크 모음곡 중 1. 프렐류드


드뷔시의 곡은 첫 선율부터 몹시 황홀해서 지금까지 즐겨 치는 곡이 되었고 쇼팽의 곡은 특정 부분의 리듬이 몹시 어려웠던 기억이다.


첫 마디 끝부분 오른손 리듬이 어려웠다.


이후에 베토벤 소나타 몇 악장, 리스트와 쇼팽 에튀드 중 몇 곡 등을 배웠는데 어떤 내용을 어떻게 배웠는지는 기억이 가물하다.



열심히 레슨을 다니던 중 오래 썼던 영창 업라이트를 처분하고 아빠가 그랜드 피아노를 사주셨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보물 1호다. 평생토록 간직할 계획이다.

처음 연주해 본 나의 피아노는 저음이 정말 따뜻하고 부드러워 놀랐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되자

본격적인 엄마의 감시가 시작됐다.

학년으로 1년 차이(내가 빠른 년생이라 나이는 2살) 나는 오빠가 먼저 대학에 합격했기에 다음 타자는 나였던 것이다.



당시 엄마는 항상 오전 9시경 에어로빅을 다니셨는데 가기 전에 날 깨우고 내가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본 뒤에야 나가셨다. 나는 오전 9시경에 시작해서 점심, 저녁 식사 빼고 저녁 8-9시까지 피아노를 쳤다. 수능공부도 잊지 않았다.



굉장히 힘들었던 것은

피아노는 공부와 다르게 티가 난다는 점이다.

소리가 나니까!



피아노방에서 잠시라도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엄마가 채근하러 달려오기에 연습을 멈출 수 없었다.

이때 생긴 나쁜 습관은 바로 한 손에는 만화책을 들고 한 손으로 부분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소리는 내야 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완전 비효율적인 행동이었는데

당시 아빠의 회사 동료 딸이 하루에 10시간씩 쳐서 서울대 갔다더라는 말을 들으면 지루하고 끝도 없는 연습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끔찍했다.



하루는 그날의 힘든 연습을 모두 마치고 공부도 한 뒤 침대에 누워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던 찰나, 엄마가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꿈이었던 거다. 그 고된 연습을 마치고 겨우 쉬는데! 한숨도 쉬지 못하고 다시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피아노는 정신적 노동일뿐 아니라 육체적 피로도도 심하다.

지금의 나는 2시간만 연습해도 소파에 최소 1시간은 몸져누워있어야 된다.



파릇한 10대여도 오랜 연습은 너무 고되고 힘들었던지라

나에겐 숨 쉴 틈이 필요해졌다.

엄마가 에어로빅을 간 한 시간 동안 피아노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모자란 잠을 보충하는 게 새로 생긴 나의 달콤한 큰 비밀이었다.



그러다가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후다닥 일어나서 연습하는 척을 했다.



어느 날

너무나 피곤했던 것일까.

그만 현관문 소리를 못 들었나 보다.





눈을 떠보니 엄청나게 화가 난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그날 인생 처음으로 엄마에게 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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