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콩잎절임
보통 '외갓집'이라 하면 으레 넓은 마당에 감나무가 서 있고, 아궁이에 장작이 타는 넉넉한 시골집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외가는 늘 방 한 칸, 혹은 두 칸짜리 비좁은 월세집이었다. 부산 강서구 대저동, 그 짠 내 나는 땅 위에서 몇 번을 옮겨 다녔지만 형편은 늘 비슷했다. 하지만 그 소박하고 좁은 공간이 내 어린 시절의 가장 따뜻한 우주였다. 집은 비록 좁았으나 그곳엔 늘 누군가의 인기척이 있었고, 구수한 밥 냄새가 났으며, 무엇보다 할머니의 평온한 숨소리가 있었다.
방학이 시작되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 짐을 싸서 외갓집으로 향했다. 사실 내가 살던 용호동 집이라고 해서 사정이 썩 나은 건 아니었다. 그곳 역시 가난이 문지방까지 찰랑거리던 동네였으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때는 우리 집만 궁색했던 게 아니었다. 골목을 사이에 둔 앞집도, 뒷집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지지리도 못 살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난은 숨겨야 할 부끄러움이 아니라, 그저 모두가 함께 견뎌내야 하는 긴 장마 같은 것이었다. 용호동이나 대저동이나 사는 모양새는 비슷했지만, 그래도 방학이면 외할머니가 계신 그곳이 마냥 좋았다.
어느 해였던가, 운 좋게 마당이 딸린 집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매실나무와 감나무가 서 있었고, 집 앞에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만큼 좁은 길이 있었다. 그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수로였다. 여름이면 아침 햇살이 마당 깊숙이 눕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수로로 향했다. 신발을 제대로 꿰어 신을 새도 없이 물가로 내달리면, 차가운 물살이 종아리를 훅 훑고 지나갔다. 몸이 차가운 물에 익숙해질 즈음이면 수로의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한참을 놀았다. 물살이 허리를 스칠 때마다 물의 흐름이 피부로 생생하게 전해지던 그 감각이 아직도 선하다.
수로에서 흘러나온 물은 논으로 퍼져 벼 사이사이를 적셨다. 한여름, 물을 넉넉히 머금은 흙에서는 따뜻함과 습기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바람이 불면 비릿한 흙냄새와 벼 잎의 풋내가 뒤섞여 물가에 있는 내 코끝까지 건너왔다. 그것은 물과 흙, 그리고 벼가 태양 아래서 함께 끓여낸 여름 논의 냄새였다. 지금도 문득 그 시절을 떠올리면, 손에 끈적하고 뜨거운 여름 공기 한 조각이 잡힐 것만 같다.
겨울이 오면 풍경은 또 다른 색으로 변했다. 수로의 물이 빠지고 바닥에 얼음이 두껍게 깔리면, 외삼촌이 톱으로 켜 만든 투박한 나무 썰매가 등장했다. 얼음판 위를 쇠붙이가 긁고 지나가는 "스윽, 스윽"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나면 누구나 한 번쯤 하던 일을 멈추고 수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했다. 가진 것은 부족했지만, 그 시절의 겨울은 그렇게 제멋대로 굴면서도 우리의 하루를 꽉 채워주었다.
그 무렵, 어린 나는 유독 할머니의 얼굴을 자주, 그리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초점 없는 한쪽 눈이 이상해 보여서였다. 젊은 시절 일을 하다 다치셨는데, 가난 탓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들었다. 어린 나는 그 상처의 깊이나 세월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할머니는 그 불편함을 핑계로 일을 줄이거나 쉬는 법이 없었다는 점이다. 해야 할 일이면 망설임 없이 몸을 먼저 움직이셨다. 잃은 것을 붙들고 한탄하기보다, 남은 몸으로 오늘을 살아내는 분. 잃은 것에 오래 매달리지 않는 사람, 그게 우리 할머니였다.
외갓집의 기억은 늘 냄새와 함께 소환된다. 그중에서도 콩잎절임은 그 집을 설명하는 명함 같은 음식이었다. 밥상에 오른 콩잎을 입에 넣으면 가장 먼저 곰삭은 액젓의 짠맛이 혀끝을 때리고, 이어 다진 마늘의 알싸한 향이 코를 찔렀다. 고춧가루가 양념의 물기와 섞이며 만든 매운 기운이 잎맥을 따라 입안 가득 퍼졌다. 씹을 때마다 억센 잎에 밴 양념이 배어 나오며 짠맛과 매운맛, 그리고 발효된 쿰쿰한 향이 번갈아 올라왔다. 그것은 비싼 재료 때문이 아니라, 만드는 사람의 손이 여러 번 간 음식에서만 느껴지는 '시간의 맛'이었다. 그 맛은 어딘가 할머니의 삶과 닮아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오랜 세월 소금물과 볕에 다듬어진 무늬가 있는 깊은 맛.
고추부각 또한 외갓집의 공기를 이루던 요소였다. 마당에서 여름 볕을 잔뜩 머금고 바삭해진 고추, 뜨거운 기름 솥에 넣자마자 "치이익" 하고 들리던 경쾌한 소리, 그리고 고추 특유의 매운 향이 기름 냄새와 섞여 퍼지던 순간. 그 시절에는 그 바삭한 반찬 하나가 식탁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길과 땀이 필요한지 몰랐다. 그저 늘 거기 있는 반찬인 줄만 알았다.
할머니는 왜소한 체구보다 힘이 훨씬 좋으셨다. 이모가 칼국수 가게를 할 때, 성치 않은 몸으로도 매일 가게로 나가 궂은일을 도맡으셨다. 산더미 같은 김치를 담그고, 무거운 양파망을 번쩍 들어 옮기고, 마른 장작 같은 손으로 온갖 일을 해내셨다. 누구에게 생색 한 번 내는 법 없이, 그저 딸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몸으로 하루를 버티던 분이었다.
잊히지 않는 시절이 있다. 우리가 대저동으로 이사를 와 작은 동네 슈퍼를 꾸리며 살던 때였다. 아버지는 술을 너무 좋아하셨다. 하루 일하면, 다음 날은 어김없이 술타령이었다. 한번 술을 입에 대는 날이면 대낮부터 밤이 늦도록 취기가 가시질 않았고, 아버지의 요란한 주사는 슈퍼 문밖을 넘어 온 동네에 울려 퍼지곤 했다. 동네 사람들이 다 알 정도였으니, 어린 마음에도 그 부끄러움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보통의 장모라면 사위가 창피해 얼굴을 붉히거나,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워 혀를 찼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지쳐 방바닥에 널브러진 사위를 보고도, 할머니는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으셨다. 장사를 하는 딸을 대신해 그저 부엌으로 들어가 묵묵히 밥상을 차리셨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잦아들면, 할머니는 밥상을 들고나와 아버지 앞에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박 서방, 속 베린다. 밥 한술 뜨게.”
그 짧은 말에는 비난도, 꾸짖음도, 서운함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술독에 빠진 사위의 속을 걱정하는 덤덤한 챙김뿐이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할머니도 어쩔 수 없으셨나 보다. 평생을 꼿꼿하던 몸도 서서히 약해졌고, 총명하던 기억도 치매라는 안개 속에 갇히고 말았다. 마지막 기억 속 할머니는 요양병원 침대 위에 작게 누워 계신 모습이다. 늘 분주하게 움직이시던 모습은 오간데 없고 그 거친 손이, 차가운 병원 시트 위에 힘없이 놓여 있었다. 코를 찌르던 소독약 냄새와 종잇장처럼 얇아진 피부의 감촉이 아프게 남았다. 당신의 딸과 손주도 알아보지 못한 채 허공을 바라보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흥얼거리던 그 모습은, 지금도 가슴 한구석을 아릿하게 만든다.
나는 가끔 시장에서 콩잎절임을 사 온다. 겉모양도 비슷하고 쿰쿰한 냄새도 얼추 비슷하지만, 막상 입에 넣어 보면 그 시절의 맛이 아니다. 양념의 비율 때문만도 아니고, 재료의 차이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음식에는 만드는 사람의 손길이 남는다고 했던가. 외할머니의 콩잎절임에는 그분의 거친 손이 수십 번 오갔고, 인내했던 세월의 두께가 얹혀 있었기에 그토록 깊었을 것이다. 그러니 시장에서 파는 매끈한 콩잎절임이 아무리 흉내를 낸들, 그 맛의 깊이까지 따라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끔 입안에서 맴도는 그 짠맛을 떠올릴 때면 외갓집 부엌의 낮은 창문이 생각난다. 그리고 불편한 한쪽 눈으로도 삶을 놓지 않고 끝까지 응시하시던 할머니의 뒷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그 기억은 소리 없이 조용히 내 안에 남아 묵묵히 나를 붙들어주는 가장 큰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