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홍성두_서울교육대학교
무엇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분야를 보는 건강한 세계관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사의 직무를 제대로 바라보기 이전에 지금 교육계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고자 합니다.
저는 현재 우리나라 교육계가 외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교육의 정치화와 사법화가 가속화되었고, 지난 십 수년 동안 “학교는 시장이다”라는 입장과 “학교는 세계관 개조의 공장이다”라는 입장의 비교육적인 정치권력간의 충돌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난장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육계에 교육의 언어가 사라지고, 경제와 정치의 언어가 표준문법이 되도록 방치한 것은 우리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학교는 시장이 아닙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생산하는 부가가치로 존재의 가치가 결정되는 공간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학생들에 대한 존중의 수준이 결정되어서도 안 되는 공간입니다. 학생은 존재 그 자체로 학교에서 존중받아야 합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존중받는 경험을 하고 그 존중을 함께 나누는 곳이 학교여야 합니다.
배우의 연기력보다 학벌을 더 중요하게 기사화하는 한국 사회의 풍토 속에서, 교육계 내 시장주의는 매우 중요한 사회적 화폐(Social Currency)로 기능하게 되는 학벌주의를 더 공고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시장주의를 맹신하는 학부모들은 나의 아이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학벌 습득 그리고 더 나아가 교육자본을 통한 부의 세습에 기능하지 못하는 교육시스템을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부모들의 상당수가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일 때가 많다는 것이 교육적 불행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장주의 세계관으로 교육을 받게 되면, 학교가 시장이고 온 나라가 매일 경쟁뿐인 희망 없는 시장 사회로 보이게 됩니다. 나의 삶이 내 자식의 생에 부가가치를 증진할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한 계층 사회에서 출산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A.I.시대에 A.I.보다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인간은 더 이상의 존재 가치가 없어집니다.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A.I.를 마치 인간을 대체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단연코 아니라고 선언해야 하는 곳이 교육의 세계입니다.
교육이 학벌주의와 학교시장주의와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육은 현재 대한민국에 만연해 있는 시장주의에 입각한 기능적 효율주의와 싸워야 합니다. 효율성의 언어를 사용하는 교육계 수장들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이런 시장주의 철학에 입각한 돌봄교육은 돌봄의 근본 철학을 망각한 거짓된 돌봄, 돌봄은 사라지고 노동과 부가가치의 논리만 남아 가정의 모든 인력을 저임금의 노동시장에 내모는 세련된 포장지가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리고, 학교는 세계관 개조의 공장도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수많은 교육적 담론이 다양하고 장기적인 논의를 통해 합의를 이루어야 하는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온갖 교육내용들을 정치권력을 통해 강제필수 교육화하고 있는 상황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입니다. 다양성과 선택의 시대에 역행하는 강제필수교육의 졸속 강행은 결국 진실로 가치 있는 교육내용까지도 방법상의 고루함으로 인해 거부감의 대상이 되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이는 제나라 시대의 백가쟁명이 필요한 때에 마오쩌둥의 백가쟁명을 만들어 버리는 행태입니다.
이런 상황들로 인해 상당히 좋은 교육적 담론들이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교육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게 되지 못하고, 교육적 강제화를 시키는 사람들을 개념 있는 사람처럼 돋보이게 해주거나, 그들의 정치권력의 재획득에 이용되거나, 타인을 혐오하는 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념적 도구가 되어 버리는 게 우리 시대의 교육계의 슬픔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오른쪽이나 왼쪽을 볼 때가 아니라 앞을 바라봐야 할 때입니다. 그 앞에는 자식을 통한 학부모의 욕망 구현,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라는 강박의 시장주의, 정치권력으로 강요된 올바름성이라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이 장애물들을 모두 넘어서는 길이 우리 학생 모두가 자신이 자신다워질 수 있도록 하는 푸른 초장을 향하는 길입니다. 그 길로 이끄는 것은 이 시대의 교사들의 직무에 앞선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사는 그곳에서 목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사의 직무는 무엇일까요? 그 답은 제가 옛날에 은사님과 나누었던 대화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경험하셨던 가장 좋았던 장관은 어떤 분이셨나요?”
“○○○ 장관님”
“왜요?”
“우리 교사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거든.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본질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었어.”
“학급당 학생 수가 줄었잖아요, 학생 수 줄어서 좀 편해지셨어요?”
“글쎄, 예전에는 하나된 60명이었는데, 지금은 각각 30명이라서, 지금이 더 힘드네.”
교사 직무의 본질은 ‘학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육청 단위로 학생을 잘 가르치고 있다고 기사를 내거나, 교육부에 학생을 잘 가르치고 있다고 보고서를 쓰거나, 국회에 강요된 교육내용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학교, 진짜 교실이라는 날 것 그대로의 공간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학생을 가르친다’는 이 단순한 이야기의 의미가 한 세대 사이에 큰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개별화된 학습적 필요를 가진 30여 명의 다양성과 인격을 온전히 존중하며 그들의 학습적 필요-학벌적 욕망이 아닌-를 충실히 채워줘 가는 것입니다. 30년 전에 한 반을 가르친다는 것의 난이도와 지금 한 반을 가르친다는 난이도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배웠던 예전의 하나된 60명의 교육 세계에 멈춰 있는 사람들은 개별화된 필요를 가진 30명의 학생을 가르치는 것에 30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언제부터인가 교육부와 교육청은 학생의 필요가 아닌 유권자이신 학부모님들의 필요를 채워주도록 교사들을 독려합니다. 학생의 필요가 아닌 온 가족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교사가 할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교육에 진심이 있는 학부모님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양질의 교육력을 통해 내 아이의 학습적 필요를 채워주는 학교입니다.
분명히 교사의 직무를 다양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업 및 학습지도, 생활지도, 학급운영, 전문성 신장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학생을 잘 가르치는 교사’가 가장 직무 본질에 충실한 교사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사 직무의 본질이 되도록 교육부, 교육청이 도와야 합니다.
이제는 교사의 권리를 넘어서서, 학벌시장주의와 세계관 개조주의로 인해 사회 전반이 망각하고 있는 ‘잘 가르치는’ 교육의 권리를 되찾을 때입니다. 살아있는 교육을 가지지 못한 세대는 몰락을 통해서 교육을 다시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몰락 이후에 교육의 본질적 가치의 중요성과 교사 직무의 본질을 깨닫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2023 겨울 호 목차
1. 시론
2. 특집
3. 티처뷰
4. 이 책 한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