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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우 Feb 25. 2023

아버지의 연장함

수필

아버지의 연장함

                                                             

  오랜만에 찾아 온 고향집, 마당 한쪽에 콘크리트 벽돌로 만든 간이 세면장이 있고, 그 옆에 계단을 오르면 세면장 지붕에 장독대가 있다. 그 곳에 올라서면, 숲 사이로 지척에 있는 바다가 보이고, 작은 동네의 산과 들과 집들이 널려있는 풍경이 평화로워 보여서 집에 오면 그냥 올라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오늘은 실망이다. 지난겨울에 앞집이 옛날 집을 헐고, 새로 현대식 집으로 지웠다. 1층 건물이지만 지반을 높게 해서 장독대로 올라서도 바다는 이제 볼 수가 없다, 바다도 볼 수 없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 옆에 텃밭에 있던 무화과나무에서 농익은 무화과를 따 먹을 수도 없다. 누가 베어버렸는지, 고향 집은 예전의 평안함을 잊어갔다. 스레이트 지붕에 흙으로 지은 집의 오른쪽, 작은방 옆에 있는 헛간에 내가 들어간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할일 없이 궁금하기도 하고 무료한 시간 속에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을 뿐이다. 거기에 예전에 우리가 어릴 적엔 농기구와 여러 가지 연장들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난방용 보일러 시설이 있고 잡다한 나무토막들이 쌓여 있을 뿐 예전의 그 분주함보다는 그냥 먼지 속에 묻혀있는 듯 했다. 뒤쪽에 소를 키우던 공간이 있던 자리는 아주 오래 전에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듯한 땔감용 장작만이 가지런히 무료하게 쌓여있었다.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있는 헛간을 나오려다 잡다한 나무토막들 속에 빛바랜 아버지의 연장함을 발견한 순간, 코끝이 순간적으로 찡해 왔다.     


  아버지는 목수였다. 섬이지만 농사일을 할 만한 전답도 있었다. 소득이라기보다는 자급자족할 만큼의 농사일은 대부분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의 몫인 경우가 많았고, 아버지는 대개 배를 짓는 일이나 집을 짓는 일을 하면서 돈을 마련했다. 같은 동네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다른 동네나 타 지방으로 가서 오랫동안 목수 일을 하느라고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그 연장함은 아버지의 지게에 얹혀 져 언제나 조수처럼 따라 다녔다. 그 연장함의 무게가 장난이 아니므로 어린 우리들은 감히 옮길 수 없는 것은, 톱, 대패, 망치, 끌, 도끼, 먹줄 등등, 톱도 종류가 여러 가지, 끌도 용도에 따른 다른 게 여러 개 있었다. 아버지가 일을 안 가시고 집에 있는 동안에는, 감히 우리가 아버지 모르게 그 연장을 이용해 새총도 만들고, 팽이도 만들고, 장난질을 하기도 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알면 혼나는 일이라 흔적을 남겨놓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가끔씩 동네사람들이 아버지의 연장을 빌리러오기도 했지만 우리는 아버지에게 혼난다면서 거들먹거리면서 빌려주지 않으려고 했던 건, 어린 우리 아들들은 아버지의 연장에 대한 자부심,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버지가 만드는 것에 대한 자긍심을 자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통통배 한 척을 지으려면 며칠씩 걸리는 일이라, 그런 일을 시작하기 전이면 아버지는 그 연장함 속에 있는 연장들을 꺼내어 땀을 흘리며 갈고, 닦고, 기름칠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고 나면, 그 연장에게서는 예전에 보지 못한 파란 빛을 낸다. 그 빛들은 이제 막 군에 들어간 신병이 깍은 머리에서 파란 빛이 나는 씩씩한 모습으로 열병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 연장함을 보고, 아버지 것인지를 우리 아들들만 아는 게 아니라 동네사람들도 다 알았다. 그만큼 그 연장함은 아버지의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였지만 어른이 된 지금에 생각해 보면, 나를 키운 건 그 연장함의 덕이 8할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돈이 귀한 그 시절에, 며칠씩, 보름씩, 한 달씩, 집을 비우고 난 뒤 돌아오시는 날에, 아버지가 벌어 오신 돈으로, 장에서 새 옷도 사 입었고, 표준전과도 샀으며,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밭도 샀다. 쿵쾅, 쿵쾅, 통통통, 텅텅텅, 아침에 잠을 깨는 건, 아버지의 연장소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건 생기발랄한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집의 풍경의 하나 뿐은 아니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 그 소리로 인해 우리가 행복한 어린 날을 보냈다는 추억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이 쿵쾅쿵쾅하는 소리를 내며 연장 질을 하는 날이면 어머니는 잔소리가 많았다. ‘새끼들까지 집안을 어지럽힌다’고, 그래서, 아들들은 그 아버지를 닮아서 연장을 잘 다루었다. 그 들 중에 몇은 아버지를 닮은 일을 생업으로 하는 일을 하며 산다.     


  아버지는 5년 전에 여든 세 살에 돌아가셨다. 5남 2녀의 자식들이 다 결혼해서 손자가 10명이 넘는다. 다 복 받은 영감이라고들 한다. 그래도 누구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픔이 있는 게 사람 일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신세 한탄을 하는 걸 들은 적은 없는 거 같다. 다만 큰 호통을 자주 치셨다. 누구든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다 다르듯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화를 푸신 거라고 이해 한 거는 내 나이가 50이 넘어서다. 철이 늦게 든 건지 아버지의 인생에 대해서 늦게 생각해 본건지 그건 차지하고, 어느 때 나도 아버지를 닮아 있다는 걸 느끼곤 한다는 거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가 생각나면 와락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아버지의 인생이 불쌍하다거나, 애처롭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다, 치열하게 살다간 아버지와 내가 겹쳐있다는 동질감 같은 거다. 치열하게 사는 내가 힘들 때, 생각나는 아버지는 그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나처럼 이런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이해다. 나이든 아버지가 가버린 아버지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다. 아버지를 생각하는 건, 언제나 나의 아버지로서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이제는 나의 아버지가 아닌, 개인으로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한 개인으로, 한 남자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의 삶을 생각을 참 늦게 해보는 건 아니다. 예전에는 머리로서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가슴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거다. 머리로 생각했으므로 진심으로 생각해본 게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3년여의 시간 동안, 요양병원에서 거의 갇혀 있던 시간을 보내던 그 때에는,내 삶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로 느꼈기 때문이다. 사정이 어찌되었건, 그 곳에 있는 동안에 내 마음의 상태는 언제 무너질지 모를 부서진 담벼락 같은 거였다. 안타까움과 자괴감과 무력함이 넘쳐 있던 나는, 휴일에 아버지를 병문안 가는 것 가체가 고통이었다. 아버지가 한 사립 요양병원에 입원하게 된 건, 아버지가 내게 울먹이며 말씀 하셨던 것처럼, 내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꼭 그게 아니라도, 어쨌든 그 일로 해서 내가 마음에 불편함을 한 개 더 갖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네에서 힘이 가장 세고 정정하기로 이름이 나 있던 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그 힘을 잃어버린 듯 했다. 어느 해 추석명절에 고향에 다니러 갔을 때, 동네 바다에 놔두었던 낙지투망에 걸려 든 낙지를 가지러 동행 하는 길에서 본 아버지의 등이 너무 많이 굽어 있으며 걸음걸이가 너무 노쇠해 있다는 걸 알아버렸다. 동료나 친구들과 부모님 이야기할 때면, 아버지의 건강함을 자랑하던 나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릴 때 아버지는 건강함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동네 명절 때 풍물놀이 하면,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을 어깨에 올려 메면 그 사람은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춤을 추기도 하였고, 더운 여름날, 혼자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여러 종류의 고기를 잡아 와, 동네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나로 하여금 괜히 우쭐대게 했던 일, 바닷가 기슭에 작은 막사를 만들어 놓고, 배를 만들고 계실 때의 햇빛에 그을린 구릿빛의 건장함, 그런 아버지가 급기야는, 가끔씩 정신을 놓아버리는 일이 생겼다.

옛날 일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하기도 하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시기도 하며 어머니를 힘들게 하기도 하고, 결국, 어머니 혼자 감당하기 힘 드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원인은 오래 전에 귀가 어두워서 보청기를 하신 아버지였는데 그 때쯤에는 아예 보청기를 끼지 않으셨다. 손재주가 좋으신 아버지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아무리 좋은 보청기도 불편한 건 있기 마련이다 보니 더 좋게 하려고, 새로 사 준 보청기를 가지고, 나사를 풀었다, 조였다를 되풀이하다 보면, 결국은 그 보청기는 망가져버리곤 했다. 그래서 아예 보청기는 포기한 상태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대화하는 사람은 겨우,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와의 이외의 사람과는 대화가 안 되는 그 가슴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래서 많이 답답했을 것이고, 가슴에 하고 싶은 말들을 담고, 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에 울화가 치밀어 그 열이 몸으로 뻗혀, 머리로 올라, 정신을 놓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드디어 걱정하는 전갈이 시골에 사는 사촌 형에게서 왔다. 더 이상 아버지를 이곳에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전달을 받고, 아버지를 모시러 가는 나의 아픈 마음을 대신해서 무섭게 내리는 빗속을 달려, 시골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예전처럼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계시는 멀쩡함을 보여주고 계시는 정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설득하여 도시로 모셔 와야 하는 둘째 아들의 입장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아버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밥도 먹지 않고 울먹이고 아버지에게 부산으로 가자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아버지는 마음을 바꿔, 내게 밥을 먹게 하고는 부산에 오는 길에 나섰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자신보다 나의 불편한 입장을 덜어주려는 배려라는 걸 느꼈지만, 어느 것이 아버지를 위한 길인지에 대한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부산에 온 이후. 형님 댁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상태는 생각보다 가족들을 많이 힘들게 하는 지경에 있어서, 결국 병원신세를 지게 하기로 결정하고, 입원을 하였다. 입원하지 않으시려는 아버지를 억지로 따돌리고 입원한다고 야단을 피웠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 아픈 건, 그 날 부산으로 오는 길에, 잠시 순천 휴게소에서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아버지가 다시 고향으로 가겠다고 달아났던 일이 생각이 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입원하고 얼마 후,아버지를 뵈러 간 날,나는 참 많이 울었다. 그 날,아버지가 나를 보자마자, “너 때문이라고, 내가 안 가겠다는데 네가 가자해서 왔으니, 네가 책임지고 나를 집에 가게 해 달라”며, 내 허리춤을 잡고 한 참 동안 놓지 않으시던 울부짖던 아버지, 그날 이후 난, 잠을 자다가도 깜짝깜짝 놀라 깨곤 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약에 대한 욕심을 많이 부리시는 거 외에는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시고 점차 기력을 일어 갔다. 열악한 사립요양원은 갈 때마다, 가슴을 찢어지게 했다. 월비용도 만만하지 않아서 5형제가 분담하여 병원비를 내고 있는 터, 막내와 나는 좀 더 좋은 환경의 병원을 찾아보기도 했었다. 형제들이 가끔씩 병문안을 갔었고, 내 마음속의 불편함은 가시지 않을 뿐이었다. 


  설, 연휴 동안에 병원 갔을 때, 아버지는 숨만 쉬고 있는 앙상한 환자들만 있는 중환자병동에 있었다. 잠깐 눈을 떴다 감고 말 뿐,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 뒤 3일 뒤에 심근경색으로 오후쯤에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아무도 임종을 못한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3일장 날엔, 갑자기 안 좋은 날씨가 풀렸다. 그도 그런 것은, 돌아가신 날 입관하기 전에 잠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절차가 있었다. 그 때 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편안해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그 동안 엄마나 우리 아들들에 대한 원망으로 눈을 제대로 못 감으셨을 거라는 불편함 마음을 일거에 뺏어 간 그 짧은 순간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작은 위안을 받았다. 그처럼 아버지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는 것처럼, 그 날은 너무 따뜻했다.      

  아버지의 상징 같은,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하는 그 연장함을 그대로 두어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그 연장과 같이 했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연장을 사용하는 것은 가장으로의 책무를 다하기 전의, 당신이 살아가는 의미, 가장 즐거워하는 행위이며, 무언가 만들어 낸다는 성취감, 그게 당신의 꿈이고, 희망이었을 거다. 그런 능력을 가진 당신의 실력으로 내가 느낀 행복을 기억해 봅니다. 농번기나, 일요일에 집안을 거들 때면 의례히 사용했던, 지게라는 것을 두 팔짱에 걸친 우리 아들들은 저마다 자기 지게가 있었다. 동네사람들이 부러워하던 그 지게, 내 몸에 딱 맞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 힘들 때 지게를 쉬어 놓고, 그 지게와 이야기도 나누었던 친구 같은 그 지게를 만들어주던 우리 아버지를 부러워하는 동네사람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우쭐해 하던 우리들, 팽이를 예쁘게 잘 깎아 주어, 우리 형제들 팽이가 제일 잘 돌았고, 아버지가 지은 배가 동네사람들이 잘 나간다고 할 때, 아침 일찍부터 집안에서 시작되는 힘찬 망치소리를 지금 기억하면 또 다른 힘이 넘치는 것 같고, 그런 모습의 젊은 아버지의 힘찬 근육과 땀을 기억하면, 아버지는 참 열심히, 건강하게 사시다 가신 행복한 분이셨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아버지의 연장함은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 가보처럼 나의 아들들에게 가보처럼 전해주고 싶은 생각에 그 연장함을 나무토막들 속에서 꺼내어 조심스레 먼지를 털어낸다.


<* 2015년 사회복지법인 청전의 ‘2015 세대문예공감’ 백일장에 우수작으로 선정된 수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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