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은 후 탁구장으로 향한다. 하루의 2막이 시작된다. 종일 글쓰기와 책 읽기로 칩거하는 인간인 내게 탁구장은 하루의 마지막을 잘 닫기 위한 관문이자 내일도 책상에 앉을 힘을 키워 주는 곳이다.
탁구장 문을 열고 기계실이 비어 있는지부터 살핀다. 나의 루틴은 기계실에 있는 탁구 로봇과의 연습에서부터 시작된다. 운동을 시작하겠다는 신호를 주어야 몸도 만반의 준비를 할 테니 굳어 있는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한다. 그제야 낮 동안 잊고 지내던 몸이 자각된다. 로봇을 세팅한 후 관장님께 배우고 있는 기술들을 연습하기 시작한다. 푸시, 백 드라이브, 포핸드 드라이브, 스매싱 순으로 연습하다 보면 몸에 점점 열이 오른다. 짧게는 20분, 길게는 40분 정도 연습한다. 어느 날은 안 되지만 더 많이 안 되는 기술 중심으로, 어느 날은 잘 되는데 더 잘하고 싶은 기술 중심으로. 그날그날 다르다.
연습 없이 레슨실에 들어가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레슨에 대한 나름의 예의이기도 하다. 어느 고수님의 말마따나 자세는 국가대표급이다. 현생에 국가대표가 되기는 불가능하니 자세와 마인드에서만큼은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 물론 자기만족이다. 학창 시절에 이렇게 예습하고 공부했으면 서울대는 아니어도 명문대는 프리패스했을 텐데. 하지만 그때의 공부는 강제적이었고 지금의 공부는 지극히 자발적인 공부가 아니던가? 지금도 누군가 레슨 전에 이렇게 하라고 시킨다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좋으니까 하는 거다. 로봇과의 연습이 끝나면 레슨 있는 날은 레슨을 받거나 레슨이 없는 날은 연습 파트너와 정해진 시스템을 연습한다.
레슨은 푸시, 백 드라이브, 스매싱, 포핸드 드라이브 순으로 받는다. 써 놓고 보니 몇 개 없네. 하지만 어느 기술이든 만만한 건 한 개도 없다. 매번 고쳐야 할 점을 알려주는데 매번 지적받는다. 백드라이브를 예로 들면 멈추는 순간이 있어야 하는데 멈추는 순간이 없고 마지막에 라켓을 잡아 주어야 하는데 마지막에 라켓을 잡아주지 않는다.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몸이 당최 말을 듣지 않는다. 언제쯤 머리로 이해하는 말을 몸이 알아들을지. 그래도 열심히 따라 한다. “멈추었다가 잡아”를 연신 외친다. 이 말이라도 제발 몸이 알아듣고 반응하기를 바라면서.
감각 운동인 탁구는 어느 기술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금세 표가 난다. 관장님이 백 드라이브 후 돌아서 스매싱을 하라고 했는데 돌아설 생각만 하느라 백 드라이브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돈다. 진짜 돌아버리겠다. 하나씩은 되는데 둘을 세트로 하려니 꼬인다. 밸런스가 중요하다. 온전히 내 기술이 되지 않은 감각들이 내 몸을 들숙날숙 드나든다. 언제쯤 다양한 기술들이 조화를 이루며 내 탁구에 스며들지. 그날을 학수고대하며 레슨실을 종횡무진 뛰어다닌다.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내 땀이 맞나 싶을 정도의 굵은 땀방울이 마룻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마음은 이내 뿌듯함으로 가득 찬다. 기술들이 내 몸에 박히는 게 느껴지니까.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게 뭔가를 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주는 기쁨이 있다. 그것이 주는 희열이 있다.
레슨을 받은 후, 휴식을 위한 테이블에 앉아 숨 고르기를 한다. 정상적인 숨으로 돌아오기까지는 20분에서 30분이 걸린다. 무리했다 싶은 날은 40분을 쉬어 주어야 하는 저질 체력이다. 레슨을 지켜보던 한 회원은 "체력이 정말 좋다"라고 혀를 내두르지만 사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레슨실에서 과도하게 뛰어다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쉰 후 연습 파트너와 정해진 연습 시스템을 시작한다. 우선 포핸드와 백핸드는 가급적 모서리로 보내면서 가볍게 몸을 푼다. 이어 푸시로 상대방의 수비 뚫기를 5개씩 번갈아 한다. 다음은 상대방의 백 쪽에 백핸드를 한 후 바로 돌아서 스매싱이나 드라이브로 5개 뚫기, 백핸드 후 포핸드 쪽에 스매싱이나 드라이브로 5개 뚫기를 한다. 상대방의 백 쪽에 백핸드 후 일직선으로 스매싱이나 드라이브로 5개씩 뚫기도 한다. 다음은 한 사람이 불규칙으로 공을 주어 화백 전환 연습을 한다. 둘 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40분, 몸이 무거운 날은 50분 정도 걸린다. 연습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잘 맞는 파트너를 잘 만났다. 연습 파트너에게 항상 감사할 따름이다. 그가 없었다면 연습을 주로 하는 난 탁구를 계속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회원들에게 연습하자고 부탁하면 연습할 수도 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연습만 하자고 할 순 없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포핸드와 백핸드를 연습하다가 지금의 연습 시스템이 만들어지기까지 2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연습도 진화한다. 연습이 익숙해지면 파트너와 상의해 조금 더 난이도 있는 연습으로 대체한다. 요즘은 지금 하고 있는 시스템을 미스 없이 하기 위해, 파워를 키우기 위해 하고 있다. 이 시간이 너무 좋다. 연습 시스템이 날로 발전하는 것도 좋지만 연습이 내 몸에 각인되는 것 같은 느낌이 좋다. 게임을 하다 연습했던 것이 무의식적으로 나올 때가 있다. 그때의 쾌감이란! 그 맛에 연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야 할 연습 시스템은 무궁무진하다. 만들기 나름이다. 3구 시스템 연습도 있고, 드라이브를 받는 연습도 있고. 반복을 지겨워하지 않는 내 성향에 딱 들어맞는다. 그리고 또 하나, 이렇게 힘들게 연습을 해야 운동량이 채워진다. 게임으로는 택도 없다. 숨이 꼴딱 꼴딱 넘어가게 운동을 해야만 만족감을 느끼는 인간이다. 내가 탁구를 치고 있는 건지, 탁구가 나를 치고 있는 건지, 머릿속이 텅 비워져 버리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낮에 있었던 일도 머나먼 옛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다시 내일을 받아들일 준비 완료. 내일을 다시 힘차게 사는 법을 시스템 연습에서 찾았다. 이러니 연습을 좋아할 수밖에. 연습에, 연습에 의한, 연습을 위한 인간 납시오.
탁구장에 머무르는 시간은 대략 2시간 30분 정도, 쉬는 시간에 회원들과 탁구 이야기, 세상 이야기도 나누기에 실제 탁구를 치는 시간은 평균 1시간 40분 정도다. 이 짧은 시간을 로봇과의 연습, 레슨, 연습 파트너와의 연습, 다른 회원들과의 연습 등으로 보낸다. 직장인처럼 매일 출근하고 매일 연습한다. (주말은 조금 다른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심플하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나를 매일 탁구장으로 이끈다. 이러한 방식으로 탁구를 치는 게 내 기질에 맞는다.
집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들이키며 ‘오늘도 잘 살았군!' 나직이 중얼거린다. 이미 마음은 만족감으로 가득 차 있다. 열심히 뛰어다닌 날은 유독 맥주 맛이 좋다. 이러다 운동 중독, 알코올 중독이 되려나?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데. 매일 이러한 행복감을 느끼며 루틴형 인간의 하루를 마감하고 싶다. 욕심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