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사랑이야, 나도 사랑이야
아빠는 무감각한 존재라는 착각.
이 세상의 아버지들은 서운함을 등에 지고 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그 인생이 사랑이었다.
원더윅스, 생후 5주 차부터 원더윅스 1차 기간이 시작된다고 한다. 단어만 들었을 때는 즐거운 분위기의 어감인데, 원더윅스 기간은 아기의 급성장 기간이라고 한다. 이 시기, 아기는 모든 패턴이 깨진다. 수유부터 수면, 감각 모든 패턴이 무너지고 성장을 경험한고 한다. 그리고 우리 아기에게도 원더윅스가 찾아왔다.
저녁 11시, 아기는 엄청 울어댔다. 평소 같으면 달래고 달래면 아기는 조용해지고 잠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또는 분유를 주면 아기의 울음이 멈추는데 그날은 유독 아기가 달래 지지 않았다. 이렇게도 달래 보고 저렇게도 달래보아도 아기의 울음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아내가 안아보겠다고 해서 아기를 아내에게 넘겼는데, 그때 나는 엄마라는 존재의 벽을 느꼈다. 역시 엄마는 엄마였다. 엄마의 품에 안기자마자 아기의 울음이 그쳤다. 엄마의 뱃속에서의 10개월, 그간 아기와 엄마가 함께 느낀 엄마의 심장박동, 엄마의 향기, 엄마의 품은 아빠와는 공유할 수 없는 감각들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정말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소인배처럼 아기에게 서운함이 몰려왔다. (지금은 아무렇지 않지만, 그때는 처음 겪는 무력한 감정이어서 더 서운했나 보다.) 아빠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최근에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영화를 보고 부성애에 관하여 고찰해 보았는데, 현실에서 아빠는 그저 엄마에게 밀리는 존재였다. 신은 왜 엄마와 아빠를 만들었을까? 아빠는 엄마의 생명 양육 프로젝트를 서포트하는 존재인 걸까. 물론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엄마와 아빠에게는 각각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이 있다. 그래도 언제나 아기에게 1등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또는 1등을 양보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이 쓸데없는 잡생각들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런데 소인배 같은 마음에서 또 하나의 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기는 내가 사랑을 줄 존재라는 것. 아기의 존재가 사랑이라는 것. 아기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애를 쓰거나 아기의 사랑을 조건화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가 된다는 것. 사랑은 그저 주는 것이고, 주면서 자연스럽게 채워지는 것이라는 것. 내가 짧은 여정을 살아오면서 그 사랑의 가치를 알려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또 그 사랑을 주는 기쁨을 배워왔기 때문에 미소를 지으며 아기를 값없이 온전히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아기에게 내가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고, 1위가 아니어도 괜찮다. 결혼이라던가 출산이라던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인생의 제2막을 시작한다는 말을 쓰곤 한다. 어쩌면 인생의 1막은 내가 내 인생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인생의 2막은 내가 너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아기를 키워낸다는 것은 본격적으로 내가 나를 위해 살아가는 인생을 뒤로하고, 너를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겠다는 결심, 내가 1막에서 살아오며 심장에 차곡차곡 쌓아온 사랑을 본격적으로 내어주겠다는 실전의 고백. 사랑의 이름에는 서열이 없고, 오로지 기쁨만 있을 뿐이라는 것.
적어도 나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류의 사명은 생명을 계승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소유는 언젠간 사라질 것들이고, 인생의 고와 낙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세상에 행복총량을 늘릴 수 있는 "사랑이 넘치는 생명"을 키워내는 것이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내가 이룰 하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랑의 여정에는 분명히 원칙과 훈육의 갈등, 오랜 인내와 고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뜨거운 아기를 안고 있으면 그런 어려움들보다도 이 아기가 나중에 품을 희망과 꿈들과 행복이 너무 기대가 된다. 힘든 시간들 이면에는 배로 넘치는 행복이 있겠지. 이 사랑의 여정의 시작점에 선 나는 육아휴직이라는 제도 안에서 삶을 재점검할 수 있어 정말 행복하고 세상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