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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ha Sep 21. 2022

연기 (1)


[연기]

 1. 연기(煙氣) 무엇이 불에 탈 때에 생겨나는 흐릿한 기체나 기운. 

 2. 연기(演技) 배우가 배역의 인물, 성격, 행동 따위를 표현해 내는 일.

 3. 연기(延期) 정해진 기한을 뒤로 물려서 늘림.

 4. 연기(年忌) 해마다 돌아오는 제삿날, 운수가 사나운 해          




  “한별아 뭐하냐? 형님 왔는데 얼굴 한 번 봐야 하지 않겠냐?”     


  서울이 좋다며 고향을 떠났던 민수한테 전화가 왔다. 민수와는 명절 때면 동네에서 만나 맥주 한 잔씩을 홀짝이며 수년 전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들을 매년 반복하는 그런 사이였다. 작년에 서울에서 제법 알아주는 회사에 취직했다는 아주머니의 자랑 덕에 어머니가 들들 볶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명절도 아닌 시기에 무슨 일이지 싶었다.

  저녁 즈음에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차려입은 모습에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눈치다. 이 동네는 10년 동안 여전하다. 빌라들 사이로 여기저기 살며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차들도, 보도블록을 뜯고 붙이는 공사장들을 피해 걸어야 하는 것도. 그리고 예전부터 우리의 아지트가 되곤 했었던 호프집의 촌스러운 간판까지도. 가게에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서 과장스레 손을 흔드는 녀석이 보인다. 이미 비어있는 맥주잔이 하나 있는 것을 보니 먼저 도착해서 마시고 있었나 보다.


  “여어~ 히사시부리~!” 

  “안주라도 좀 시켜두지. 그리고 오타쿠 같이 그게 뭐냐. 바른말 고운 말 몰라?” 의자를 빼 앉으면서 괜스레 녀석을 타박했다.

  “깐깐하기는... 오타쿠도 일본말이거든? 이모~ 여기 500 하나랑 쏘야 하나 주세요!” 

  “근데 무슨 일 있어? 내일 출근 안 해?” 그제사 안주를 시키는 녀석을 보며 강냉이를 입에 물었다. 

  “하.. 형이, 진짜 열심히 했거든? 근데, 이 자식들이 인센도 제대로 안 챙겨주고, 월급도 밀리네? 10일이나 지났는데 말야. 그래서 때려쳤다. 사람을 써먹으려면 돈은 제때 줘야지!” 민수는 연신 맥주를 들이키며 분개했다. 

  “그래서, 주긴 준다냐?”

  “몰라, 임금 체불로 신고했으니까 주긴 주겠지. 뭐, 암튼 나도 너처럼 시간 부자 됐으니, 이제 종종 보자.” 

 “시간 부자라니. 야, 취준생 모르냐, 취준생?” 

  나는 실소를 터트리며 맞장구를 쳐줬다. 늘 이 놈 하고는 그렇다. 뭐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 없이‘민수가 남몰래 좋아하고 있던 예림이가 반장이랑 사귀는 바람에 고백하기도 전에 차였던 이야기’ 따위를 반복하는데도 즐겁다. 이런 것이 불알친구인가 싶기도 하다.     


  이모가 눈치를 줘서 가게를 나왔다. 단골 가게의 장점 아닌 단점은 주인장이 가라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시간이 제법 흘렀는지 깊은 밤 내음이 코를 간질인다. 새벽을 향해 달리는 하늘에 빛나는 별은 몇 개 보이지 않는다. 저 별 이름이 무어더라.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뿌연 연기가 마치 성에처럼 시야를 가렸고 이내 별들도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나는 손을 흔들어 연기를 흩트려본다. 


  민수는 반짝반짝 빛나는 제 차 앞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차를 팔러 다니는 사람이 뚜벅이면 쓰겠느냐면서, 무리해서 장만했던 민수의 보물 1호다. 어차피 이번 생에는 집을 사긴 글렀고 차라도 타고 싶은 것을 타야 한다나. 그런데 낌새가 뭔가 이상하다. 


  “기사 잡았어? 그러게 왜 차를 가져왔어.”

  “아. X발. 진짜. 견인이 왜 안 돼요! 그럼 저도 아무 데나 막 차 대놓고 다녀도 되는 겁니까?, 이런 것 처리하라고 내가 낸 세금 받아먹는 거 아니에요?” 

  “왜 무슨 일인데?”

  “이 X끼 주차한 것 좀 봐. 심지어 연락처도 없어. 시청에 전화했는데, 견인도 안 해준다네? 아오... X발” 

   아니나 다를까. 좁은 골목길 사이사이를 비집고 주차한 차량이 빽빽하다. 아무래도 민수는 오늘 보물 1호를 길바닥에 두고 가야 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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