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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ha Sep 21. 2022

연기 (2)

  비밀번호를 누르고 조용히 집에 들어오는데 거실 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 ‘재벌 집 아들이 생활력 강한 계약직 여주인공에게 반해서 인생 역전을 한다’라고 요약되는 드라마에서 멋진 외제 차를 탄 남주인공이 고백하는 장면이다. 어머니는 그 빤한 스토리를 좋아하셔서 몇 번이고 다시 보곤 하신다.


  “아주 그냥 술 냄새가 진동하네. 누구랑 이렇게 마셨어?” 

  “민수랑. 집에 왔다고 하더라고.” 

  퉁명스레 대답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마땅히 손이 가는 게 없다. 그래. 마땅히 하고 싶은 것도 없다. 하릴없이 냉장고를 닫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변했다.


  “민수? 걔 무슨 외국계 자동차 회산가 뭔가 다닌다는 그 친구?”

  “그만뒀대.” 

  “왜?”

  “몰라. 뭐 일이 있었나 봐” 

  “모르긴 뭘 몰라! 이리 와서 이야기 좀 해봐!”

  어머니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며, 당장에라도 일어설 듯 되물었다. 괜히 이야기를 늘어놔봤자 잔소리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이럴 때는 그냥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나도 몰라. 나 얼른 씻고 자게.”

  “야! 너도 좀 나가서 돈을 벌어야지! 졸업 한지가 언젠데, 언제까지 그렇게 놀 거야!? 정신 좀 차려!” 

  “요즘 취업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알아서 다 준비하고 있다고!”

  괜히 어머니에게 성질을 부리고선 화장실로 향하는데 뒤통수가 따갑다.      


  얼굴에 차가운 물이 닿으니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다. 그래. 정신을 차려야 한다. 벌써 졸업하고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여전히 무얼 해야 할지, 왜 사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대학까지는 그냥 시키는 것을 하거나 남들 하는 만큼만 해도 충분했었는데, 졸업 이후 취업이라는 관문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허들이 너무 높아진 것이 느껴진다. 평균만 해도 괜찮다던 이야기들은 취업에 이르러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상위 10%의 중견기업 정도는 가야 그 정도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성공을 이야기하려면 1%에 불과한 대기업을 가야 한다. 그 안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실패자인 걸까?     


  그날 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엄마에게 자랑하는 꿈을 꿨다.          



  간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오히려 개운하다. ‘예지몽 아냐?’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런저런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서도 코웃음이 난다. 진짜 노량진 같은 곳에서 하루에 열 시간씩 공부하는 사람들도 떨어진다던데 요행을 바라는 것임을 나도 잘 안다. 혹시나 하며 그냥 한번 치러봤던 공무원 시험은 역시나 가당치도 않았다. 


  조그마한 휴대전화를 통해 보는 세상은 죄다 학벌은 SKY에, 5~600의 월급을 자랑한다. 나 역시도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을 줄 알고 호기롭게 대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넣은 적이 있었다. 그리곤 면접은커녕 ‘안타깝게도...’, ‘죄송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문자들만 몇 번 받고서는 깨닫고 말았다. 내가 가진 스펙으로는 가당치도 않구나. 그러고 나니 길을 잃은 느낌이다. 그냥 뭔가 앞으로의 내 삶이 너무 빤했다. 스포일러를 당한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내가 한낱 엑스트라로 지나가는 그런 삼류 영화. 


  습관적으로 구직사이트를 훑어보지만 중소기업에서 시작하는 것은 최악이라던 이름 모를 선배의 조언이 자꾸 머릿속을 맴돈다. 중소기업으로 시작해서 대기업으로 옮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번 출신이 정해지면, 그게 꼬리표가 되어 평생 따라다닌다고. 도대체 어쩌란 말인지 모르겠다. 때마침 무슨 청년 일자리를 지원한다는 배너가 보였다. 시청에서 행정 인턴을 뽑는다고 한다. 그래. X소보다는 차라리 인턴이 자소서에 넣기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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