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더위 속 무한정 걷던 피렌체의 첫번째 날이 지나고, 두번째 날이 밝았다. 아내는 너무 더웠던 날씨와, 평소 걷던 양의 한 5배는 걸었던 일정에 매우 피로함을 호소했고, 나 역시도 그랬다.
오늘은 일정상 7시에는 파리행 비행기를 타야했던 지라, 딱히 관광을 진행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고 피로도를 고려하여 체크아웃 시간인 10시에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나는 체력이 완충되어 있었고 '피렌체까지왔는데?'라는 생각에 우피치 미술관을 속전속결로 혼자서라도 해치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우피치 미술관은 피렌체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 온라인 사전예약은 최소 3일전에는 했어야 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미술관이 열리는 시간에 가서 티켓을 현장결제하는 오픈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8시 15분부터 오픈인 것을 확인하고 아내에게 9시 반까지 되돌아 오겠다며 7시45분에 숙소를 나섰다. 숙소 밖은 이른 시간인데도 꽤나 더웠고 프랑스에서와 달리 수많은 관광객들이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오픈런도 실패하겠다 싶어 거의 뛰다시피 우피치 미술관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나와 같이 현장 티켓결제를 하려는 사람은 이미 줄을 굉장히 길게 서있었고, 온라인 사전예약한 사람들도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머리속으로 티켓을 기다리는 시간과, 입장을 기다리는 시간, 숙소를 되돌아 가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우피치 미술관에는 한 15분 정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holy..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날씨는 매우 더워지고 있었고, 나는 빠른 결정을 해야만 했다.
긴급하게 유툽을 열어서 우피치 미술관을 쳐보니 우피치 미술관 투어가 있는게 아닌가? 하하. 유럽의 르네상스 풍 회화나 조각들은 많이 봐왔었으니 아내와의 여행이 주목적임을 망각하지 말고 조신하게 숙소로 돌아가는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일말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로 천천히 되돌아가는데 미술관 밖에 있는 조각상들이 어디서 많이 본 것같은 표정들이었다.
그렇다. 영화 '300'에서 나오는 원로원 사람(을 연기한 배우)와 완전히 똑같은 2명을 발견했다. 그 영화를 찍을때에 이런 얼굴들을 고려해서 캐스팅 했던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머리스타일마저 달랐다.(그런데 시기가 다르긴한데..?) 그리고 조금 밖으로 나오니 나처럼 피렌체의 대표 관광지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모조 조각상들이 한곳에 뗴로 모여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관람을 했다고 나를 달래며 숙소로 돌아왔다.
피렌체 여행 2일 내내 더위 더위 더위만 입에 달고 살게될줄은 몰랐으나, 이렇게 상황에 놓여진 이상 비행기 타러가기 전까지는 가뿐하게 움직이고자 캐리어를 맡기러 기차역으로 향했다. 호텔이었으면 컨시어지에서 짐을 보관해주었겠지만 에어비앤비는 특성상 짐을 맡아주지는 않는 것 같았다. 물론 호스트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이야기 했지만, 내가 체크아웃 한 이후에도 다음 숙박객들이 연달아 있어서 어쩔수 없었다.
더 더워지기전에 아내와 캐리어를 끌고 기차역에 있는 짐보관소로 향했다. 검색해보니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도 종종 있고, 위치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살짝 신경이 날카롭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나의 날카로움은 계획대로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기 때문에 피렌체 광장을 지나는 순간만큼은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끼며 잠시 쉬어가기도 했다.
그 시간대에 나처럼 짐을 맡기러 가는 사람, 기차역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굳이 구글 맵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사람들을 뒤따라가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쫄래쫄래 편안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
우리가 기차역으로 가는 와중에도 기차역을 통해 피렌체로 들어오는 관광객 무리들도 많이 있었는데, 유럽 아재들로 추정되는 패키지여행객들이 신호를 가뿐히 무시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탈리아 운전자들은 참지 않고 크락션을 연신 울려댔지만, 아재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휘파람을 부르며 무단횡단을 하고 있었다. 인종은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인류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나라나 다른나라나 똑같구나 싶은 아재들 특유의 뻔뻔함에서 동지애를 느꼈다.
우려와 달리 아주 수월하게 짐을 맡겼고, 가벼운 상태로 마지막 피렌체 관광에 떠났다.
출발하기전 아내가 하고 싶어했던 것은 전통시장 구경과 빈티지 샵 방문, 그리고 피자 맛집 가기였다. 물론 나도 너무 동의하는 바로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지 못하듯 출발하자마자 나온 마트에 나와 아내는 홀리듯이 들어가버렸다.
나는 와인에 문외한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알고보니 좋은 것이었다는 걸 먹었을때 기분이 매우 좋아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vivino 어플을 활용해서 한국에서 구매하는 것 대비 매우 저렴한 제품을 찾아나섰다. 결국에는 한국에서는 17만원이지만 여기서는 35유로인 것을 낚아채서 기쁜마음으로 돌아갔다.
마트에 진열된 제품들을 보며 기념품 챙기듯 커피, 파스타 면, 와인, 통조림 등을 담았고 신나게 결제하고 나왔다. 하루가 지나고 생각이 든건데, 기차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도 되었을텐데 여정 시작점에서 짐을 바리바리 사서는 무겁게 돌아다니는 우리들 자신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피렌체 중앙시장은 생각보다 너무 가죽제품만 널어놓고 파는 기대 이하의 느낌이었다. 호객행위도 꽤 많이하고 불편함을 느끼던 찰나에 조금이라도 시원한 곳에 가야겠다 하고 옆에 있는 건물에 들어갔는데, 거기가 찐 '중앙시장'이었다(머쓱).
의외의 발걸음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안도감을 느끼며 시장 구경을 하는데 매우 재미있었다. 치즈를 팔거나 발사믹 식초를 한무데기로 모아서 팔거나, 정육점과 수산물 판매하는 곳까지.. 이정도면 피렌체의 뒷골목(?)은 충분히 본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중앙시장을 나서려는데 간단하게 먹을수 있는 음식들을 도시락처럼 파는 곳을 발견했다. 내가 생각했던 '찐' 피렌체를 느낄수 있을 것만 같은 곳이라 하나씩 맛이나 보자며 아내와 음식을 골랐고 우리 말고도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러 왔는지 줄이 길었다. 가게 주인 부부는 매우 신나게 음식을 요리하고 주문을 받고 있었는데, 그걸 보는 나까지도 기분이 좋아지는 분위기였다.
시금치 전병같이 생긴 것과 라자냐를 시켰는데, 두개 해서 9유로 밖에 안하는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양이 매우 많아서 깜짝 놀랐다. 특히 라자냐의 맛이 굉장히 훌륭했는데, 미리 검색하지도 않고 찾아가지도 않은 가게에서 이렇게나 맛있는걸 찾았다는 것에 신기해했다. 한국에서 먹어본 라자냐는 그 면이 내게는 너무 두껍게 느껴졌었는데, 이것은 면이 있었나 싶을정도로 얇아서 부담스럽지 않았고 아내가 설명해준 '베샤멜 소스'는 진짜 미치게 부드럽고 맛있는 맛있었다.
곧 점심으로 피자를 먹어야한다는 생각에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정신차려보니 바닥을 포크로 긁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 다음으로는 원래 가고자 했던 피자집에 2차로 점심먹으러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나는 소화가 안되었는지 배가 빵빵한 기분이었고, 아내는 맛있는걸 마주하고 있어서 그런지 한국에서보다 훨씬 먹성이 좋아진것 같았다.
원래는 내가 아내의 2배의 양을 먹고 마시는데, 피렌체 여행 중일때는 정반대로 내가 소식좌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다음에 또 가게 되면 배고픈 상태로 다시 가봐야지..)
피자집은 굉장한 명성을 자랑하는 곳이었고 우리가 도착한 시간이 점심먹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는지 별도로 대기를 하지 않고 바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직후에 미국 고등학생들로 추정되는 무리들이 5팀 정도 들어왔는데 영어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니 프랑스에서와 달리 옆자리에서 뭐라고하는지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어, 엿듣는 재미가 있었다. 그 중 한 팀은 미국 하이틴 영화에서 늘 나오는 외관을 가진 남자4, 여자3명이었는데 남자들은 약간 럭비를 즐겨할 것같은 태닝된 백인 애들이었고, 여자들은 올빽머리를 한 역시나 태닝한 백인 애들이었다. 분명히 일진 그 어딘가에 속하는 애들일 것이라고 추측하며 웃었다.
배가 부른 탓에 모짜렐라 double로해서 피자를 한판만 시켰다. 그런데 우리 크기가 굉장히 컷고 관광지의 도시답게 눈치껏 접시 두개로 나눠서 서빙해주었다. 아내는 피렌체에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다고 연신 감탄하며 먹고 있었는데, 나는 배가 부른 탓이었는지 약간 짭조름한 꽤 맛있는 피자였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피자의 본고장이라서 그런지 도우의 쫀득함과 토마토 소스의 토핑 등이 상당히 준수한 편이었다고, 평론가 빙의해서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간략하게 계획했던 일정이 생각보다 일찍 끝났는데, 밖은 너무나도 더운 상황인지라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와중에 빈티지 샵을 구경가기로 결정!. 다행히 근처에 빈티지 샵들이 몰려있는 거리가 있어 방문하게 되었다. 그 중 한곳의 빈티지 샵에서는 선글라스들을 굉장히 다양하게 팔고 있었는데 아내의 취향을 저격했는지 그곳에서 한참을 머무르게 되었다.
꼼꼼히 따져본 결과로 아내는 유럽여행의 필수품인 선글라스를 갖게 되었고 파리에서 굉장히 유용하게 사용했다. 아내의 얼굴형과 크기 등을 고려했을때 파리의 라파예트 백화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유니크하고 딱 적합한 제품을 찾게되어 신기했다.
파리로 돌아가는 비행기가 7시인 탓에 5시까지는 공항에 들어가야해서 피렌체에서의 두번째날은 짧았고, 아침에도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하지 않았던 지라 잔잔하게 피렌체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피렌체 첫날과 달리 적당한 시간에 TABAC에서 버스표를 사서 트램을 타고 가뿐하게 슝슝 공항으로 출발했다. 피렌체를 빠져나오기전에 아쉬운 마음에 길거리에서 젤라또를, 공항에서 에스프레소를 한잔씩 마시며 비행기를 탔다.
일정을 파리 > 리옹 > 피렌체 > 파리로 짤때만 해도 이 일정이 어떤 피로도를 가져올지 몰랐었는데, 이동간의 피로가 최고조로 누적되는 시점인 피렌체에서 가장 무더운 더위를 직격을 때려맞았다 보니, 파리와 리옹에서의 즐거운 기억보다는 아쉬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내도 일정을 다시 파리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피렌체에서 한국으로 out하는 방향으로 했으면 괜히 이동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는데, 어쩌겠는가. 이미 그렇게 해버린걸!!
나는 이번 유럽여행에서 카페에 잔잔히 앉아 책을 보는 여유를 부려볼 요량으로 늘 백팩에 책을 넣어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무거운 것도 있었지만, 언제 있을지 모르는 간지(허세)를 놓칠 수 없었기에 그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신없던 파리와 더웠던 리옹과 피렌체에서는 책을 꺼낼 엄두도 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파리로 되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옆자리 외쿡인분이 당당하게 책을 읽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약 2시간을 비행하는 일정이라 나도 지지 않고 책을 꺼내 읽었다. 이륙하기전까지인 약 10분정도만 읽고 굉장한 피로감을 느낀 나는 책을 덮고 노트북을 열어 만화책을 보기 시작했다(머쓱..)
진지하게 만화책(원피스)에 빠지게 되었는데 최근화의 경우에는 가독성이 떨어지고 잠깐 보기에는 서사가 너무 길어서 초반 부분을 들여다 보았다. 루피가 아론파크에서 나미를 꺼내오는 에피소드였는데, 나미가 도와달라고 말하는 순간에 한순간 오타쿠로 변신하여 엄청난 감동을 느껴버렸다.
이래서 고전은 시대를 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옆을 슥 보는데, 나를 약간 애매하게 쳐다보는 아내의 눈빛을 보고 다시 현실세계의 일반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Next episode : Home sweet home(in pa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