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맞이한 두번째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이제는 한껏 익숙해진 파리가 되어있었고, 아내와 함께 지난 여행들을 되짚으며 리옹과 피렌체에서의 극심한 무더위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하는 이야기의 끝은, 마치 파리가 집같다고 느끼고 있는 우리였다. 진짜 집은 한국, 서울에 있는데 말이다.
여행 일정 중 Second Half에 지내는 파리의 일정은 총 4일. 귀국하는 날의 출국시간이 9시인것을 감안하면 정말로 4일을 풀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첫날과 두번째날(전체 일정 기준으로는 8일차와 9일차)에 파리의 명물인 미술관을 방문했다. 우와 여기를 꼭 가보고만 싶어! 라기보다는, 이곳까지왔는데 여기를 안들릴수 있나~? 하는 마음이 컷던것 같다.
그렇게 오르세 미술관과 퐁피두 미술관을 섭렵(?)한 아내와 나는 남은 일정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꽤나 길었던 여행을 잘 갈무리하면서 파리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컷던것 같다.
그렇게 결정된 두번째 일요일의 일정의 시작은 파리 남쪽에 있는 방브 마켓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사실 방브 마켓은 아내가 욕심낸 몇 안되는 방문리스트였다. 아내가 파리에 대해 기억하는 방식 중에 하나는 큰이모님과 함께 방문했던 경험이었다. 파리에서 예쁘고 좋은것들을 찾기 위해 방문했던 큰이모님과 그의 뒤를 쫓으며 즐거워 했었던 기억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 경험의 꼬리가 나에게까지 온전히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빈티지하고 자그마한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아내를 본다는 것 자체가 마냥 신기했다.
원래 아내와 세운 계획에 따르면 아침 9시에는 그곳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인터넷에는 1시까지 한다고 써있지만, 아내의 기억으로는 괜찮은 곳들은 11시면 문을 닫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왠걸. 눈을 떠보니 9시가 넘은 상황이었고 준비하고 가는데만 해도 11시는 금방 넘을것만 같았다. 포기할까 고민하던 아내를 '그래본 적 없지만' 다그치듯 일으켜세우며 10시 반에 도착해서 30분만 보더라도 가보쟈- 라고 힘을 불어넣었다.
일어날 생각은 매우 약했지만 오히려 내가 옆에서 눈이 똘망똘망해져서는 가려고 하니 아내도 동기부여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내가 지내고 있던 숙소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트램을 탈 수 있는 역이 있었는데, 오늘도 여지없이 쨍하고 화창한 날씨에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특히나 나는 반팔입고 아내는 코트를 입어도 되는 날씨라는 점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경험을 해본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로써는, 파리에 와서 트램을 타볼 수 있는 기회가 마냥 즐거웠다. 왠지 더 현지스러운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고, 파리의 중심부와는 꽤나 떨어져서 그런지 정말 일반사람들이 살 법한 건물들과 가게들이 많이 보였다.
순식간에 도착한 방브마켓에는 이른시간부터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벼룩시장인데 어쩜 이렇게 진심으로 판매하는 사람이 있고, 구매하는 사람이 있는지 마음 속 깊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이게 또 여행의 진면목 아닌가 싶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파는 그림을 사거나 빈티지 의류를 사보고 싶었지만, 의류는 정말 동묘시장이 떠오를 정도로 딱히 고를만한게 없었다. 그림의 경우에도 이미 디지털화 되버린 세상에서 저작권이 있는것도 아니고 어떤 방식으로 출력(?)했는지 모를 작품을 돈을 주고 산다는게 와닿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그림이 주는 느낌이라던지, 최근에 만든게 아닐것 같은것에 더욱 눈길이 많이 갔다.
나와 다르게 아내는 작은 소품과 그릇, 그리고 작은 모든것에 관심을 가지고 눈빛이 반짝였다. 그래서 내가 휙- 하고 넘어가 버린 곳에서 좋은 제품을 찾아내기도 했고, 너무 좋게도 불어를 할 수 있으니 더욱 다양한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느덧 파리에서 10일차인 나는 눈치껏, 코치껏 불어로 하는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분명 단일한 단어들이나 문장으로는 전혀 알아들을수 없었을텐데, 아내와 상대가 불어를 말하는 표정과 억양들을 보고 대충 뭘 물어보는지 떄려맞출 수 있었던 것 같다.
빈티지 가구 중에서도 조명에 대해 나와 아내가 유사한 수준의 관심을 보이며 알아보았는데, 짐을 그렇게 크게 가져갈 생각이 없던 우리의 마음의 벽에 부딪혔다.
결국 우리는 크리스탈 와인잔(샴페인 잔일수도)과 아주 작은 그림 하나를 샀는데, 꽤나 고심 끝에 구매를 결정했다. 특히 크리스탈 잔의 경우에는 어디서 만들었는지, 단단한건지, 등등 다른 상품들과 많이 비교도 하고 실용적인것 뿐만 아니라 미학적인 관점에서 고민을 했다.
이런 식의 고민을 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뇌가 활성화 되는 기분이라 오늘도 미술관을 간거나 다름 없는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번의 흥정 끝에 구매를 했는데, 한국에 와서도 두어번 사용한 걸 보니 꽤 유용한 걸 사왔다는 기분이 든다.
이때의 우리는 정말 길거리 담배냄새에 질려버렸는데, 너무나 수많은 연령대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위치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그 냄새는 고스란히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다고 생각했고, 누적된 예민함에 지쳐 주변에서 담배만 봐도 기분이 상했다. 그런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파리에서 길빵 한번정도는 즐겨줘야 파리를 제대로 즐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후술하겠지만 결국에 나도 극혐하던 파리지앵의 모습을 해보긴 했다. 그 과정에서 아내는 매우 화가 났고, 내가 말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한참이 지나고 나서 이해한 뒤에 우리는 다시 즐거운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두번째 일정은 몽마르뜨 언덕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가 이번에 세운 여행의 컨셉이 '휴가를 갔는데 거기가 파리네?' 였어도, 세계적인 관광지를 놓치지 않고 가고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
나는 그곳에 간다는 것만으로 이런것이 충족될 수 있었고, 아내는 몽마르뜨에서 모두가 가는 사크레쾨르 대성당보다 그 옆에 있는 몽마르뜨 박물관을 더 원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의 설명에 따르면 파리에 모인 예술가들을 동경했던 르누아르가 자신도 작품활동을 시도(?)해봤던 것들이 전시되어있는 곳이었고, 그가 작업하던 공간도 잘 보존이 되어있다고 했다.
이럴때마다 아내의 MBTI가 P인지 J인지 헷갈렸지만, 본인의 선호에 대해서는 확실히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되면서, 앞으로의 결혼생활에서도 잘 참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이끌림에 지하철역에서 어디 외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몽마르뜨 언덕 뒷길로 관광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 지나고나서 느낀 것이지만, 인터넷에서 알려진 '몽마르뜨언덕 가는길'로 올라왔다면 뜨거운 햇빛에 땀을 한참을 흘렸을 수도 있었겠다.
관광지 답게 사크레쾨르 대성당 근처에 도착할 수록 수많은 관광객들이 즐비했고, 관광지 안에서 더 깊은 파리를 느끼고자하는 관광객들은 명소로 보이는 카페에 앉아 야외 커피를 즐기고 있었다. 곳곳에서는 악기를 다루고 있는 예술가들이 많이 있었고, 그냥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다는 기분을 받았다.
남들과는 다르게 방향을 꺽어 들어간 몽마르뜨 박물관. 나는 대성당 앞에서 단순히 사진을 팍!하고 찍는 것보다 이곳에 오는게 더욱 유익하고 여행을 가득채우는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내와 함께 구경을 시작한 작품들도 너무 인상깊고 아름다웠고, 전날의 퐁피두에서와 같이 각자 다른 속도로 감상하는 것들도 너무 좋았다. 특히 몽마르뜨언덕에서 보는 파리 시내 전경을 회화로 표현한 것이 너무 인상깊었다.
내가 파리에서 위치와 방향을 잡을때 지표로 사용했던 포인트를 너무 간단한 차이로 표현했다는게 감명깊었다. 이번 여행에서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앵발리드의 금빛 원형돔은 센강을 타고 이동하는 내내 지금 내가 어디에 위치했는지 가늠하기 위한 지표로 쓰였는데, 노란색 물감 한번의 터치로 그걸 구현해 냈다는 것이 마냥 신기헀다.
그 외에도 커피를 한잔 할 수 있던 정원도 너무 인상 깊었는데, 이곳을 잠시 앉기 위해서만이라도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정도였다.
우리도 어느새 파리지앵이 되었는지 오렌지주스 하나와 리옹에서 감명깊게 먹었던 키쉬를 하나 시켰다. 음식은 먹는둥 마는 둥하고 서로 수다 삼매경에 빠졌는데 이곳 날씨에 대해서, 이곳에 앉아있는 다른 사람들의 여유에 대해서, 때마침 딱 하나 남은 의자에 앉을 수 있는 행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물론 키쉬의 경우에는 리옹의 세계최고의 존맛집을 따라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먹을만한 수준은 되었던 것 같다.
한참을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앉아있는지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는데, 부녀관계로 보이는 둘이서 음료를 마시며 왠지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딸은 굉장히 개방적인 옷차림에 아버지는 댄디 스타일 그 자체였다. 그 둘은 프랑스인 답게 여유롭게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엇지만, 대화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목을 앞으로 빼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두루미나 백조를 보는것처럼 목이 휘어있어서, 우리나라의 부녀간 적은 대화량은 척추 건강에 도움을 주는게 아닌가 싶었다.
아내는 특히 르누아르의 작업실에 들어오는 햇빛을 좋아했고, 그가 설계했을지도 모르는 정원의 풀들, 전시장 속 샷시 및 소품에 푹 빠져있었다. 그 분위기를 정말 좋아했는데, 지금 열어보는 사진첩에서 아내가 이 몽마르뜨 박물관을 얼마나 좋아하며 사진을 계속해서 담았는지 전해지는 것만 같다.
3시간을 가까이 머물렀던 몽마르뜨 박물관을 나와서 수많은 인파가 물밀듯이 쏟아져들어가는 길에 몸을 맡겼다.
정신차려보니 우리도 사크레쾨르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찾는데는 이유가 있긴하고나 싶었다. 뷰도 정말 너무 좋은데다가 햇빛과 바람까지 완벽하니 사진을 안찍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와 다른점이라고 한다면, 아내만을 피사체로 담던 나였는데 나도 함께 셀카 등의 방식으로 이곳에 방문했다는 도장을 찍고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다. 서로 사진도 찍어주기도 했지만 남들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고 포즈를 취하는 상황이 마냥 즐거웠다.
괴담과는 다르게 잔디에서 쥐는 발견하지 못했다.
몽마르뜨언덕의 관광은 몽마르뜨 박물관에서 대부분 뽑아냈다고 생각한 우리는 여운이 깊게 남아보이던 다른 관광객들과는 다르게 꽤나 빠른 속도로 언덕을 내려왔다.
가다보니 근처에 '사랑해 벽'이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방향을 선회했다. 가는길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고 있는 레바논식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마침 달달한것도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줄을 서는데 이상하게 비둘기들이 땅바닥의 무엇인가를 열심히 주워먹는것이었다. 얘네들은 대체 뭐가 먹을게 있길래 이렇게 화이팅있게 다니는것이지- 싶었는데,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콘아이스크림 겉에 피스타치오를 잔뜩 묻혀준다음 위에 크림을 올려주는 것이었는데, 내가 먹기에는 너무 달았고 아내가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날은 점점 더워지고 있어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려 어쩔수 없이 겉면에 묻은 피스타치오들이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주변에 비둘기들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그들에게는 아마도 꽤나 영양식(심지어 먹기도 편한)이었을 것이다. 나는 순식간에 다 먹어버렸지만, 아내는 비둘기를 피하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 손에 안묻으려고 서둘러 먹으랴 정신이 없어보였다.
수많은 신혼여행객들이 파리를 갔다오면 남겨오는 사진 배경인 사랑해 벽에 도착했다.
나는 사대주의에 빠진 사람답게 여행중에 한국말이 들리는 것을 꽤나 경계했는데, 그곳은 정말 한국이었다. 과장보태서 말하자면 그곳에서 사진찍으려 줄서있는 사람의 절반은 한국사람이었다. 어쩌면 한국사람을 위한 벽이 아니었을까? 싶은 정도이긴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도 포즈를 취하는데 익숙해진 우리는 누군가를 찍어준 댓가로 우리도 사진을 찍을수 있었다. 처음에는 냉소적으로 바라봤던 사랑해 벽이었지만, 막상 결과물을 보니 이곳은 파리의 명소가 맞구나 싶을정도로 좋은 사진을 남길 수 있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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