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와 장남사이
광안대교의 푸른빛이 바다에 누웠다. 산으로 둘러싸인 고층 건물에서 요란한 금빛이 쏟아졌다. 황령산 전망대에서 보이는 전경은 뒤집어놓은 워터볼처럼 아름다웠다.
‘저 작은 창 하나하나가 다 집이란 말이지.’
그 빛나는 풍경을 아무리 뒤져도 우리 집은 없었다.
결혼 전에는 부모님 집이 곧 ‘우리 집’이었다. 결혼 후 ‘우리’의 주체는 남편과 나로 변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독립된 개체로서 살 집을 구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둘이 벌어 온 돈은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세금을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에 빠졌다.
“은행에서 빌리면 대출 이자가 나가겠지?”
“그것도 모이면 다 돈인데 말이야.”
“어차피 조금 있으면 너는 다시 배 나가잖아. 나 혼자 살 집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임시 집을 구해야 할까?”
“좋은 생각 있어?”
“... 우리, 엄마 집에서 잠시만 신세 지자.”
“뭐? 장모님 댁에서?”
“너 승선하면, 나는 엄마 집에 살면서 돈을 모을게. 너 돌아올 때까지만.”
배를 타고 오면 목돈이 생겼다. 내가 모은 돈을 보태고, 대출을 조금 얹으면 전셋집 하나쯤은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 몇 개월 더 신세 진다고 뭐라고 하시겠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수저부터 준비한 셈이었다.
제멋대로 부부의 막무가내 요구에 부모님은 거절도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어색한 처가살이가 한 달 넘게 이어졌다. 곰만 한 사위 한 명이 집에 들어왔다고 거실이 가득 찼다. 노크 소리가 나면 남편은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 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부모님도, 우리가 나타나면 어딘가 긴장돼 보였다. 계획대로만 일이 굴러갔다면 조그만 해프닝으로 끝날 얘기였다. 하지만 인생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건강검진 날이었다. 선원은 출항 전에 필수로 병원에 들러 몸 상태를 확인한다. 영도의 지정된 병원에 가서 차례를 기다리고 검사를 받았다. 결과에 이상이 없다면 다음 주라도 배를 타고 나갈 참이었다.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은 항상 침울했다. 대기실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호주에서 한 달, 한국에서 한 달 반을 쉬고 이제는 정말 바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럴수록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게 되는 게 헤어짐을 앞둔 부부의 심정이었다.
“네? 많이 나쁜가요?”
안 좋은 소식은 불현듯 찾아왔다.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는 간 수치 때문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배를 탈 수 없다는 게 주된 용건이었다. 지금까지 바다를 오갈 때마다 건강검진을 받았다. 나쁜 간 수치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오래 쉬면서 불은 체중도 한몫했다.
“내가 술 좀 작작 마시라고 했지?”
선상생활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는 술과 담배를 면세로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다. 건강에 도움은 안 되지만, 안 사면 손해 같고 사면 이득 같다. 일을 끝내고 자기 전 마셨던 시원한 맥주가 독이 됐다. 아니면 휴가 때마다 폭음하는 음주 습관의 문제일지도 몰랐다.
눈을 흘기며 엉덩이를 두드릴 때만 해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이걸로 나갈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겠구나. 다행이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금방 나아질 것 같던 수치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금주와 운동, 꾸준한 약 복용에도 회복은 느렸다. 하루, 이틀 눈치가 보이던 게 한 달, 두 달이 지났다. 결국 정상으로 돌아가는 데 꼬박 넉 달이 걸렸다. 걱정 없던 휴가 시절까지 포함하면 처가살이가 반년 가까이 늘어났다는 얘기였다.
딸 한 명 건사하는 건 부모 된 처지로 별것 아닌 일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며느리가 딸이 될 수 없듯이, 사위도 아들이 될 수는 없었다. 28평 중 방 한 칸을 차지한 신혼부부가 엄마, 아빠 눈에는 덩치만 큰 새끼 새처럼 보였으리라. 식비를 내기는커녕 가끔 봐오는 장으로 성의를 대신했다. 남편은 할 줄 아는 요리로 마음의 부담을 덜려 했다. 하지만 덜어진 부담이 오히려 엄마의 짐이 되고 말았다.
"아이고, 내가 할게. 놔둬라."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옛날에 지어진 아파트 주방은 공간이 작았다. 그 작은 공간이 엄마의 성역이었다. 복잡하게 쌓인 식재료도, 포개놓은 그릇도 엄마만의 규칙이 있었다. 돕겠다는 명분으로 덩치 큰 사위가 주방에 눌러앉아 요리와 설거지를 도맡았다. 엄마는 그 모습을 자못 불편해했다.
남에게 싫은 말을 못 하는 아빠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겉으로 티는 안 났지만, 눈치가 보여 우리도 방 안에서만 생활했다. 아빠가 이삿짐을 나르며 얻어온 킹사이즈 침대는 방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누워서 뒹굴뒹굴할수록 몸도 마음도 둔해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휴가에 내가 먼저 사표를 던졌다. 일자리를 구하고 출근해 있는 동안 남편은 엄마와 집을 지켰다. 어떻게든 버텨보자 생각했던 처가살이에 돌풍이 분 건, 어느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시댁에서 돈 빌려달라고 했다더라.”
퇴근 후 저녁이었다. 집에 왔는데 남편이 없었다. 한껏 가라앉은 엄마가 식탁에 앉아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아무래도 시부모님과 나눈 통화 내용이 엄마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심장이 싸늘하게 식었다. 들고 있던 가방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저는 장남이잖아요!’하고 소리치는데,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아무리 자식 같은 사위도 반년은 길었다. 집세도 내지 않고 거저 사는 딸 부부였다. 사정을 모르는 시댁의 요구는 엄마의 한계를 자극했다. 거기다 적반하장으로 대드는 사위의 태도라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격이었다. 그게 아니면 ‘그렇게 해서 언제 돈을 모으고, 언제 독립하니?’라는 걱정에서였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굳은 표정을 보고 있으니, 화가 치밀었다. 이건 분명 결혼 전에 끝낸 얘기였는데. 차라리 들키지나 말던가.
“상황 설명하고 못 빌려드린다고 말씀드려.”
“나는 장남이잖아.”
“우리 이거 전에도 얘기했지. 네가 장남인데 뭐?”
“......”
“언제까지 그렇게 말도 못 하고 끌려다닐 거야. 지금 우리 처지를 생각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여전히 장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는 그에게 현실을 들이댔다. 5년이 넘는 항해에도 돈이 모이지 않는 이유, 기약을 알 수 없는 처가살이, 결혼 전 시어머니가 요구했던 매달 십만 원의 용돈까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내키지 않는 진실을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
남편은 배를 타기 전에도 뚜렷한 거처 없이 떠돌았다. 대학교 기숙사가 문을 닫으면 교회 동아리방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배를 타고 난 후에는 고시원을 전전했다. 가벼운 캐리어가 짐의 전부였다. 부모님의 급전 요구에 2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 빌려드린 적도 있었다.
이제는 달라져야 했다.
“나는 이제 못 참겠어. 네가 안 되면 내가 전화할게.”
물러섬 없는 목소리에 남편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후, 어떤 통화가 오갔는지는 모른다. 다만, 벌어온 돈은 무사히 통장에 담겨 다가올 쓰임을 기다렸다. 아낀 예금만큼 장모와 사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서로의 상처를 메꾸는 데는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우리 집이라면 괜찮을 거야.’
성급했던 나의 판단을 맘속 깊이 후회했다.
광안대교 밑으로 불을 밝힌 선박이 지나갔다. 우울한 눈으로 내려다본 산자락의 야경은 그럼에도 아름다웠다. 언젠가는 저 속에서 우리 집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렴풋해도 좋다. 두 다리 뻗고 누울 수 있는 우리 집이라면. 그렇게 두 손 모아 빌어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