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양심
“일본어 실력이 좋네요. 왜 여기서 일하려고 해요?”
좁은 사무실 공기는 정지된 냉방기처럼 차가웠다. 이력서에 적은 그대로를 외운 대로 읊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매니저의 모습에 합격을 예상했다. 사실 원대한 포부는 없었다.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실정에도 우리는 미래를 계획했다. 돈 없는 신혼부부의 유일한 소일거리였다.
“각자 1년만 더 고생하자.”
“그래. 이번 배 타고 오면 전셋집을 구해야지.”
“신혼부부 디딤돌 대출이 제일 괜찮겠지?”
“응. 집은 다대포 근처로 갈까? 친정이랑도 가깝고.”
“좋아.”
“일단 집을 마련하면 바로 아이를 가지자. 나, 젊은 아빠가 꿈이야.”
“이미 젊지 않은데 어떡하려고.”
키득거리며 그려본 미래 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남편 직업을 생각하면 육아의 주체는 응당 내가 될 터였다. 아기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진 사회생활이 어려울 테니, 단기 일자리를 찾는 게 맞아 보였다. 아직 임신도 안 했는데 동구밖 구만리까지 계획부터 세웠다. 그렇게 지원한 일자리에서 채용 확정 문자를 받았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의 면세점 근무원. 계약 기간은 정확히 1년이었다.
면접에 합격한 사람에게 유니폼이 주어졌다. 스타킹을 신는 건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이었다. 블라우스형 윗도리도, 허리춤에 달린 지퍼도 단정했지만, 소화에는 좋지 않았다. <작은 아씨들>의 조가 할법한 검은색 머리망에 묶은 머리를 밀어 넣었다. 거울 속 낯선 모습에 팔을 쓰다듬었다.
국제여객터미널은 그리운 장소였다. 처음으로 떠난 일본 여행의 출발지였다. 커다란 페리에서 하룻밤을 꼬박 자야 오사카에 도착했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아도 친구들과 재잘대느라 잠이 들지 못했다. 돈은 없고 볼 것은 많아 하루에 일 킬로씩 살이 빠졌다. 그럼에도 처음 보는 외국 풍경에 하루하루가 신이 났다.
‘그때는 여윳돈이 없어 면세점은 쳐다보지도 못했는데.’
잠시 어른이 된 기분에 뿌듯했다가, 이미 충분히 어른이라는 생각에 시무룩해졌다.
가로로 길게 이어진 면세점은 하얀 조명 아래서 빛이 났다. 어떤 물건을 담당하게 될지 몰라 긴장에 몸이 굳었다. 담당 파트가 정해지지 않아 견학부터 했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담배 재고와 수십 개의 브랜드가 산처럼 보였다.
‘저걸 다 외워야 한단 말이야?’
출국장이 열리자, 이번에는 몰려오는 손님에 압도됐다. ‘제발 이 파트에서는 일하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속으로 빌었다. 계산대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돈의 횟수만큼 정신이 혼미했다.
다행히 소원은 이루어졌다. 신규 사원 세 명 중 나만 외래품 판매대로 갔다. 담배만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스와치 시계, 롱샴 가방, 캘빈클라인 벨트 등 평소에 쓰지 않는 브랜드 물건을 관리하고 판매하는 건 흥미로웠다.
“재고 여기 있네요. 이것도 하나 제대로 못 찾아요?”
수많은 손님보다 나를 지치게 하는 건 선배였다. 텃세를 부리는 한 동료가 자꾸 성미를 건드렸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다. 예전에 당한 분풀이를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하는 전형적인 강약약강 타입. 지난한 사회생활에서 끊임없이 보아온 인종이었다.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아 내렸다. 들어온 지 며칠도 안 돼서 풍파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한 해만 다닐 회사였다. 실수를 안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일이 손에 익으면 시비를 걸고 싶어도 방법이 없을 테지. 쓸데없는 감정 소비 대신 업무에 눈을 돌렸다.
“나 때는 더 심하게 당했어.”
꼭 이런 사람은 친해지면 과거를 들먹이며 자기 잘못을 무마하려 했다. 퇴사하면서 쑥스러운 얼굴로 내민 청첩장을 그대로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면세점 내의 누구도 그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인과응보였다.
여객터미널 면세점은 공항과 달랐다. 배가 뜨기 전에 열었다가 배가 없는 중간 시간에는 전체 소등 후 휴식에 들어갔다. 다들 가져온 도시락을 먹고, 수다를 떨고, 낮잠을 잤다. 신입은 열심히 재고 조사를 하며 물건을 익혔다. 기다란 영수증에는 제품 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걸 실물과 대조하는 작업은 지루하고 눈이 아팠다.
‘얼른 해치우고 쉬어야지.’
그렇게 생각할수록 꼭 한 개가 안 보였다.
일에 완벽히 적응했을 무렵 남편의 간 수치도 정상을 되찾았다. 케이블선에 취직한 넓은 등을 토닥였다. 남의 집 생활도 이번 항해 한 번이면 작별이었다.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우리 집’을 향해 남편은 나아갔다.
오전 일찍 택시에 탄 그를 배웅하고 터미널로 왔다. 가라앉은 기분에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분명한 목표 덕분이었다. 수많은 기다림과 재회를 거치며 마음에 굳은살이 생겼다.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거기다 이번 배는 가끔이라도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다. 운이 좋다면 중간에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출국장이 열렸다. 몰려드는 여행객의 등을 잡아 물건을 팔았다. 캐리어를 끌고 승선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레 남편이 떠올랐다. 짧아지는 대기줄을 바라보며 바다로 향하는 모든 이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몇 개월이 지났다. 정착했다고 생각한 부서에서 이동명령이 떨어졌다. 토산품 판매대로 가게 된 나는 홍삼과 지역 초콜릿을 팔았다.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나를 보고 ‘박쥐’라고 부르며 경계하는 언니가 있었다. 매니저의 명령에 따라 외래품과 토산품 코너 양쪽을 도왔을 뿐인데, 이 사람은 또 뭐가 문제일까. 어이없는 호칭에 목구멍이 조였다. 텃새는 지긋지긋했다. 어차피 또 지나갈 일이었다. 나는 꾸역꾸역 자리를 지켰다.
오페라 하우스를 닮은 국제여객터미널은 북항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위치를 옮겼다. 고래를 닮은 새 건물은 당장이라도 부산항으로 뛰어들 것만 같았다. 한층 넓어진 매대를 정리하고 판매를 이어갔다. 어느새 계약 종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를 알고 앞 매대에서 시계를 팔던 언니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계약 끝나면 여기서 일하는 건 어때?”
“그것도 좋긴 한데 계약직 종료라 실업급여가 나와서요.”
“실업급여는 받고 여기서 몰래 일하면 되지.”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면 안 되는 행동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이 하선하기까지 몇 달이 더 남아있었다. 그 사이에 조금이라도 더 벌어놓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합법과 생계 사이에서 양심이 저울질했다. 하루를 벌면 하루가 덜 불안할 텐데. 돈도 덜 빌려도 될 텐데. 남편은 더 고생 중일 텐데. 마음이 자꾸 나쁜 방향으로 기울었다. 며칠 밤을 뒤척이다 결국 언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 말고도 하는 사람 있을 텐데, 뭐.’
시계를 파는 기간 내내 마음속에서 돌멩이가 굴러다녔다.
남편이 돌아오고 면세점의 일이 꿈처럼 어렴풋해졌을 무렵이다. 외출했던 남편이 서류봉투를 들고 귀가했다. 가볍게 생각한 위법행위는 한 장의 통지서가 되어 돌아왔다.
“이게 뭐야? 고용노동부에서 왔는데?”
남편의 말이 귀에 꽂힌 순간부터 뒷덜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봉투를 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결국 들키고 말았구나. 나는 마치 기다린 소식처럼 체념했다. 봉투를 열고 통지서를 읽는 남편 앞에서 무거운 고개를 떨궜다.
“괜찮아. 벌금 내면 되지.”
남편은 한순간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 그건 생각보다 큰 위로였다. 한껏 구부러진 어깨를 펴고 현실을 직시했다. 몇 달에 걸쳐, 받지 말아야 했던 돈과 과징금을 모두 갚았다. 몇 개월 치의 노동이 허공으로 날아갔지만, 잘못을 저질렀으니 당연한 대가였다. 양심을 인양하는 데 든 돈치고 몇백만 원은 저렴했다. 다시는 길을 잃지 않도록, 확실한 부표 하나를 마음속에 세웠다.
그 후로 부산역 근처를 지날 때면 명치가 따끔거렸다. 힐끔 뒤를 돌아 지금 서 있는 위치를 확인했다. 그리운 이와 함께 내가 버린 양심까지 돌아오는 곳, 터미널은 그런 곳이었다.